김정기의 詩모음

집이 말한다 / 김정기

서 량 2023. 1. 24. 04:59

 

집이 말한다

 

                                                            김정기

  

누런 개 한 마리 눈에 넣고 부서져 내리는 은하수를 지붕에 주어 담는다. 담장 너머로 몰래 훔쳐보는 카이오라는 수놈은 아일랜드 사람이 주인이지만 우리가 던져주는 햄 조각에 반하여 우리 집에 낯선 기척이 있으면 짖어 댄다. 순한 눈매를 갖은 그는 희미해지는 나를 데리고 낯선 바다를 건너가려고 한다. 우리 집이 말한다. 그가 건너는 대서양을 따라가면 조국이 더 멀어진다고. 유혹의 팔소매를 뿌리치고 혈혈단신 아픈 다리를 끌고 가지만 고향산천은 멀기만 하다. 뜰에 무궁화, 봉선화, 꽈리를 키우고 정선아리랑을 들으며 여기서 세월을 삭히라고. 집이 말한다. 뉴욕에서 젖은 몸 말리고 무엇이든 서툰 대로 버티면 누명도 벗어진다고. 30년을 살아온 잉글리시 투더형 우리 집이 말한다. 방에 달린 문들도 부엌 찬장까지도 서로 말을 걸어오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오늘도 창 너머로 카이오에게 한국말로 인사해도, 보이지만 만져지지 않는 서양. 옆집 개에게 집이 말한다. 코리아의 전통, 그리고 한국인의 정신을 아느냐고. 기름기에 길들어진 유럽의 혓바닥에 불고기, 김치의 어질고 매운맛을 아느냐고 당신 나라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 이름도 모르면서 카이오에게 김소월을 읽힌다. 아직도 남의 나라, 남의 하늘에 기대어 남은 시간 순한 흙이 되는 연습만을 한다.

 

© 김정기 201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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