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 126

Summer Guest / 김종란

Summer Guest 김종란 여름 숲 물고기 진초록 나뭇잎 사이 순식간에 넘나드는 여유로움 명상에 드는 눈 깜빡이지 않는 눈 여름 바람결 물결처럼 타오른다 검푸른 초록에 잠기고 잠기면서 활짝 뜨는 눈 마음 가득 범종 소리를 담은 채 여름날 온몸 바람에 드러내는 이곳 이 순간 멀리 떠나는 풍경 소리 숲 속에서 나뭇잎과 함께 춤추며 여름바람 더불어 깊이깊이 자맥질하면서 초록 불붙는 여름날 물기 가득한 나뭇잎 초록 빛으로 타오르다가 여름 숲 눈 떴을 때 이곳 이 순간 멀리 보내는 풍경 소리 물고기는 깨어 있어 당신을, 숲을 껴안는다 © 김종란 2021.07.16

푸른 웃음 / 김종란

푸른 웃음 김종란 조그만 트럼펫을 닮은 꽃 나지막한 가을 언덕에 보라색 푸른색 꽃들이 피어 있어 그 중 하나 내게 와 눈물을 머금은 채 푸르게 흔들리고 있어 웃음 속에 푸르름을 감추고 *앨런 긴즈버그의 언어를 뛰어넘어 지옥의 신기루를 넘나들어 고개를 기웃거리며 나를 들여다보고 있어 조그만 트럼펫을 닮은 꽃 에밀리 디킨스의 시에 나오는 gentian, 용담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어 * 비트 세대의 시인 © 김종란 2021.06.26

Summertime / 김종란

Summertime 김종란 속눈썹을 껌뻑거리며 적당히 기댄채 엇비슷 시선이 교차하는 오후 낮게 허밍하며 흩어진 생각의 조각들 줍는 구부러짐 부드럽게 한번에 휘는 곡선으로 발을 감춘 청남빛으로 물이 쏟아지듯 휘어지는 눈이 부신 *알제의 태양이라든가 깊은 나무 그늘에 숨겨진 피아노라든가 한데 어울려 느리게 **사라방드 춤 추듯 청록색으로 번지는 나무의 품 2B 연필로 창문을 그린다 여름의 열기 한겹 두겹 두텁게 초록보다 진하게 침묵보다 무겁게 쌓인다 미동도 하지않고 나무는 여름으로 들어가고 있다 오래전 인화된 사진이 클로즈업 되듯 창문엔 연필로 스케치한 바람이 가득하다 * 까뮈의 '이방인'에서 ** 느리고 우아한 스페인 춤곡 © 김종란 2021.06.21

나는 당신의 잘라진 귀를 갖고 있어 / 김종란

나는 당신의 잘라진 귀를 갖고 있어 김종란 *Vincent 나는 당신의 잘라진 귀를 갖고 있어 봄의 미열을 앓으며 당신 손을 잡아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람 사람을 서투르게 사랑한 사람 사람을 사랑하려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꽃이 피어나는 미열을 앓다가 4월의 사과꽃으로 지금도 피어있는 사람 노란색으로 칠한 방에서 그 낡은 의자에 머리를 감싸고 앉아 고통스러워 지금도 당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 나는 당신의 잘라버린 귀를 갖고 있어 그건 진짜야 반짝이는 모래알같이 이제 이 세상에 남겨져 있어 찢겨져 상처가 벌어지면 숨을 잠시 고르며 그 고통을 바라보는 거야 하얀 캔버스에 보라색 아이리스가 피어나는 거야 * Vincent Van Gogh © 김종란 2008.07.28

*일각수의 흰 뿔 / 김종란

*일각수의 흰 뿔 김종란 박물관 깊숙히 어두운 조명 아래 내비치는 너의 흰 뿔 내게로 와 그 흰 뿔이 자라나 협곡 깊이 자리잡은 푸른 돌들의 형제로 와서 신화의 음률, 낮은 울타리가 된다 유월의 **하얀 리본 나무 폭우 속에 내 마음의 비도 그쳐 하얀 리본 나무 음악의 문 소리도 없이 열려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나의 기타에 비스듬히 기댄다 너의 흰 뿔은 어둠 속에서도 평화와 신비의 빛 멈춘 시간 그 곳에 멈춘 신화 낮게 더 깊게 연주되는 사파이어빛 음률 유월을 지나는 하얀 리본 나무 *The unicorn Tapestries (Cloisters museum) ** Cornus Kousa © 김종란 2021.06.09

슈만을 상상하다 / 김종란

슈만을 상상하다 김종란 텅 비인 마음이 있었다 바람도 머물지 않는 공간에 활을 그으며 운지하며, 눈짓과 화음으로 찰나를 달리는 손 등을 구부리고 주저앉은 후미진 곳 음악이 찾아와 흐른다 정신의 황홀과 불안 사이 징검다리를 걷던 그, 우리 곁으로 눈을 감고 슈만의 음악으로 들어가 이 불안과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 그에게 빛 속에서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슈만 그의 음악에 자맥질하다 취하여 날개를 단다 징검다리를 건넌다 어둠 속 그는 울고 있다 이 지극한 어둠을 내리긋는 바이올린의 활 천상의 뛰노는 음 © 김종란 2021.06.03

정적 / 김종란

정적 김종란 맑고 파란 정적(靜寂) 물방울 소리 들린다 드러난 심장 정적은 숨쉬고 있다 정적은 쏟아진다 눈 내린다 어두운 숲 듬뿍듬뿍 지워 버리는 흰 페인트 눈 내리는 숲, 숲의 노루처럼 나의 근심이 지난다 총알 보다 빠르게 꿈인듯 뛰놀다 간다 소리 없는 거미집 빛이 일렁이며 놀다 간 반짝이는 그물, 가득 주름잡힌 마리아 테레사의 얼굴이 치마끝에 흰 페인트를 묻히며 캄캄한 골목에 접어든다 © 김종란 2021.05.25

*마티스의 묘비에 돌을 놓는 물방울 하나로 / 김종란

*마티스의 묘비에 돌을 놓는 물방울 하나로 김종란 마티스의 마지막 무렵 그 단순 명쾌한 선, 순수한 빛의 색에 번지다 수많은 길을 걸어 오며 목격한 세상의 아름다움 그 무게에 기대어 물방울 하나로 웃으며 남프랑스, 소리를 머금어 버린 푸른 공기에 스며든다 비안개에 파묻히는 니스에서 물기로 머물다 흰 페인트 내리 붓는 햇빛에 들어가서 일몰의 앙티브 해변, 반짝이는 빛이다가 어두운 파도와 함께 바다가 된다 마티스의 묘비에 돌을 놓는, 그 투명한 순간 * 마티스 묘지 방문객들은 조그만 돌을 주어서 그의 묘비에 올려놓는다 (사랑, 경외감으로) © 김종란 2021.05.16

봄빛 / 김종란

봄빛 김종란 봄의 자취, 어룽지며 유장하게 몸을 흔드는 5월 나무의 춤, 한계에 다다른 높은 음 새들이 곤두박질치며 노래하는, 나뭇잎 사이 출렁이는 봄빛, 베토벤 피아노 곡 심장에 파고 들듯 봄은 즈려감은 눈으로 연주되다 intermission time 노래하고 춤추는 축제는 멈추고 초록이 되려는 녹색 풍경 지속되며 봄은 활을 높이 든다 빛과 함께 상승하는 그의 비밀 오래된 전락을 위하여, 그를 바라며 추락하는 무지개빛 눈 찰라에 저무는 눈 지그시 바라보며 *maestoso로 연주한다 *장엄하게 © 김종란 2021.05.14

어두운 미소 / 김종란

어두운 미소 김종란 어두운 호수에서 떠오르는 첫 물결 밤은 점점 어두워져 깊은 숲이 어느덧 잠기고 하늘이 하늘만큼 서서히 들어앉은 품어 보기에는 어려워서 숨 들이키다 통증이 시작되는 가슴 한편 함께 어두어져 물 밑으로 물 밑으로 나의 무게 만큼 가라 앉으며 숨 쉬는 것을 잊고 물결이 된다 소리를 듣는다 숨 죽인 곳에 살며 deep blue가 된다 © 김종란 2021.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