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의 詩모음

이 기차엔 비상약이 없다 / 김종란

서 량 2022. 12. 9. 19:27

 

이 기차엔 비상약이 없다

 

                            김종란

 

오후와 저녁 밤을 가로지르며

목쉰 소리를 내지르는 이 기차엔 승객이 없다

매캐한 연기 통로에 항상 낮게 머물러 메마른 눈

기차는 너무 빠르거나 느린지 아무도 볼 수 없다

어둠을 뚫고 가면서 형제를 만나는 생각을 했다

장방형 식탁에 팔꿈치 고이고 뜻 없는 이야기

주고 받는 겨울나무 밑 수북이 떨어진 마른 열매 하나

낙엽 기대어 뒹구는 시간을 이 기차는 형제를 만날 역전에

서지 않는다 너무 빠르거나 느려서 나는 그들을 볼 수도 없다

함께 자라난 초원 함께 손잡은 형상에 골몰하며

아주 오랜 시간 뒤 그 역을 다시 지나간다

낡고 다정한 역사(驛舍) 오후의 햇살을 받는 화단엔 그려 넣은 그들이

서있다 뒷모습 혹은 옆모습으로 

자꾸 덧칠해서 알 수 없어진 감정의 선을 면도날로 긁어 내린다

기차엔 비상약이 없다

Dime Savings Bank 오래된 교회당 불빛 멀리 어룽진다

어둠을 뚫고 지나지만 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김종란 2009.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