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詩| 간장에 비친 얼굴

서 량 2022. 3. 20. 19:36

 

날 맑은 가을날 장독대에 올라가 간장항아리에 얼굴을 집어넣으면 새까만 간장거울 속에 눈 흰자위가 분명치 않은 커다란 얼굴 열 살 짜리 얼굴 내 얼굴이 아닌 얼굴이 보인다 얼른 머리를 빼고 다시 보면 매운 고추와 숯 덩어리 몇 개 무작정 둥둥 떠 있는 간장항아리 속 간장거울 뒤쪽으로 은박지 하늘이 흔들린다

 

내 얼굴도 세모 네모 마름모꼴 사다리꼴로 일그러진다 크레용으로 북북 그린 그림 유년기 도화지 속 도깨비 얼굴 골이 잔뜩 난 도깨비 이마에 뿔이 크게 두 개 솟아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날 간장항아리 안에서 끈질기게 파도가 친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파도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끝이 안쪽으로 하얗게 말리는 어떤 파도는 나보다 훨씬 키가 크다

 

© 서 량 2004.10.23

<현대시학> 2005년 4월호에 게재

 

시작 노트:

어린 시절 왕십리 집 미음자 한식집 옆마당 양지바른 장독대에 올라가서 기지개를 피는 습관이 있었다. 간장 항아리 속에 머리를 푹 파묻기도 했다. 짜거운 간장 냄새가 코끝에 매콤했고 간장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다채로운 기하학적 존재였다가 간장 자체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간장독 안에서 집채만한 파도가 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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