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81. 그레고리

서 량 2021. 1. 25. 11:11

 

로버트가 또 며칠 동안 약 먹기를 거부했다. 병동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눈치를 보였지만 다른 환자들이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와 여유 있게 말할 짬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로버트가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약을 거절했다는 해석은 맞지 않는다. 나는 그의 마음 씀씀이를 좀 알고 있는 편이다. 전에도 바쁜 와중에 대화를 나누지 못한 상황이 몇 번 있었는데 약을 끊으려 하지는 않았다. 로버트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심리학자와 소셜워커를 포함한 직원들 앞에서 아침 회진 시간에 그(*)와 대화를 나눈다. -왜 약을 안 먹으려 하지? *나는 돈이 많이 있어요. -내가 묻는 말에 답을 피하는구나! *나는 보디 빌딩을 좋아합니다. -다시 대답해라. 왜 약을 안 먹지? 약을 안 먹으면 이렇게 자꾸 딴소리를 해서 대화에 혼란이 일어나는 걸 알고 있느냐? *그레고리! -도무지 무슨 소리냐, 뜬금없이? *그레고리!

 

우리는 서로 딴소리를 한다. 오래 전 그는 같은 병동 환자 그레고리와 주먹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TV 전망이 좋은 의자를 잠깐 비우고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레고리가 날름 자리를 차지했다. 얌체 같은 수법으로 왕위 찬탈이 일어난 것이다. 둘 사이에 치고 박는 자리싸움이 터졌고 그레고리는 톡톡히 얻어맞았다. 로버트는 당신이나 나처럼 소유욕이 대단한 성격이다.

 

소유욕이 심한 사람은 개성 또한 강하다. 틀린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길 때가 많다. 로버트는 ‘형태적 사고장애, formal thought disorder’라는 골치 아픈 증세를 보인다. ‘비논리성, illogicality’과 ‘부조리성, incoherence’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힘든다. 고집이 센 사람일 수록 비논리성과 부조리성이 질기고 끈덕진 데가 있는 법이거늘.

 

두 사람이 서로 딴소리를 할 때 상대방 말을 전혀 못 알아 듣는 것은 아니다. 둘 중 더 합리적으로 말하는 사람에게 다른 쪽이 고개를 숙여야 하겠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러지를 못한다. 먼저 포기하는 사람이 지는 쪽이다. 동물왕국의 약육강식 이론이 여지없이 적용된다.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진행된다. -네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안타깝다. 그런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겠니? *내가 지금 몇 살인지 아세요? -그레고리!

 

마지막 말은 아차, 하는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로버트의 표정이 금세 굳어진다. 다시 그에게 묻는다. -내가 너에게 그레고리! 하니까 기분이 어떠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느냐? *모르겠는데요. -그레고리!

 

로버트를 두 번 공격한 셈이다. 나는 다시 말한다. -이젠 네가 나를 혼동시키는 것은 괜찮고, 내가 너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을 못하겠지? 그러니까 이런 미치광스러운 대화를 하고 싶지 않으면 약을 계속해서 챙겨 먹기 바란다. 그는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방을 나갔다.  

 

‘Gregory’의 어원을 차후에 찾아보고 원래 희랍어와 라틴어로 ‘지켜보다’는 뜻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전인도 유럽어에서도 ‘깨어 있다’는 의미였다. 깨어 있는 로버트가 나에게 저와 소통하는 방법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그후 그는 약을 어김없이 복용했다. 형태적 사고장애도 많이 완화된 상태다.

 

나중에 심리학자가 농담조로 “I thought you’re losing it, 실성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했다. 내가 얼른 “그레고리!” 하고 외치자 직원들은 다들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 서 량 2021.01.24

-- 뉴욕 중앙일보 2021년 1월 27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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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그레고리

로버트가 또 며칠 동안 약 먹기를 거부했다. 병동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눈치를 보였지만 다른 환자들이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와 여유 있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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