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83. 옷 벗는 사람들

서 량 2021. 2. 22. 12:39

 

코로나 백신으로 지구촌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2021년 2월에 한국 소식을 듣는다. 얼마 전 한 장관이 옷을 벗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 추운 겨울에 옷을 벗다니.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옷을 벗는다는 말은 어떤 지위에서 물러난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옷만 벗는 것이 아니다. 안경도 벗고, 마스크도 벗고, 베일을 벗고, 누명을 벗고, 때를 벗는다. 벗는 양상도 헐벗다, 벌거벗다, 빨가벗다, 등등 그 뉘앙스가 다채롭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일컫는 ‘천둥벌거숭이’도 재미있는 말이다. 우리는 참 벗기를 좋아한다는 논리의 비약이 가능하다. 왜 그럴까. 다혈질이라서?

 

병동환자가 이유 없이 옷을 벗고 알몸으로 복도를 서성거릴 때가 있다. 직원이 황급히 시트로 몸을 가려주면 순순히 자기 방에 가서 옷을 다시 입는다. 이유를 물어 봐도 별로 뾰족한 답을 얻지 못한다.

 

환자들이 함부로 옷을 벗는 것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발작적으로 체온이 올라가는 순간 몸을 식히려는 본능이라는 소견이 나온다. 빨가숭이 갓난아기 때로 돌아가고 싶은 퇴행성 욕망에서라는 학설도 있다. 자신의 몸을 보여주고 싶은 노출증과 남의 몸을 보고 싶은 관음증이 공급과 수요의 쌍벽을 이루는 상태라는 이론을 나는 내세운다. 노출(露出)이라는 한자어는 시적(詩的)인 말이다. 이슬 노, 날 출. 이슬이 태어나는 정경이다.

 

옷은 몸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려준다. 아담과 이브가 지혜의 열매를 따 먹은 후 신의 심한 꾸지람을 듣고 에덴 동산을 쫓겨날 때 몸의 일부를 가린 무화과 잎이 인류 최초의 옷이었다. 그 나뭇잎은 이성을 유혹하는 방안이 아닌 자신의 수치심을 가리는 메커니즘이었다.

 

현대의 패션감각은 몸을 감추는 척 아슬아슬하게 노출시키는 이중성을 띠운다. 옷은 언어처럼 감추고 보여줌을 동시에 촉구하는 매력을 풍긴다. 중세기 귀부인들이 허리를 잘록하고 섹시하게 보이기 위하여 숨을 못 쉴 정도로 조여 입던 코르셋이 그 좋은 예다. 마켓 좁은 통로에서 천천히 앞장서 가는 중년 여인의 비대한 엉덩이를 돋보이게 하는 스판덱스 청바지가 눈에 밟히는 것도 그렇다.

 

영어는 어떤 지위에서 물러난다는 뜻으로 옷을 벗는다고 하지 않는다. ‘She took her clothes off’ 하면 그 여자가 벌거벗은 상태에 도달했다는 말. 반면에 ‘She took the cloth’는 그 여자가 성직자가 됐다는 뜻이다. 그 여자가 ‘옷을 입었다, 옷감을 택했다’라고 번역하면 말이 안 된다.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는 성직자라는 뜻으로 ‘the cloth’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이 말은 또 법관이나 군인처럼 소정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뜻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승려, 신부, 법관, 군인들은 옷이나 천을 걸치고 다녔고 일반인들은 벌거벗고 지냈다는 착각이 일어난다. 왕족이나 귀족은? 그들은 금은보화가 주렁주렁 달린 멋지고 우아한 옷을 입고 으스댔지.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좋은 옷을 과시하는 욕심이 많은 임금님이 떠오른다. 바보는 볼 수 없고 총명한 사람들만 볼 수 있었다는, 신하들이 멋지다고 아양을 떨던 부재(不在)의 옷!

 

코로나 백신에 대한 논란이 잦은 한국의 2월이다. 작년 여름 플로리다 누드 해변에 ‘옷은 벗고 마스크는 쓰라’던 주문이 있었다. 그때 한참 웃었다. 치부는 보여줘도 콧구멍만은 가리라는 현대판 규율이 호소력이 있는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다.

 

© 서 량 2021.02.21

-- 뉴욕 중앙일보 20201년 2월 24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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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옷 벗는 사람들

코로나 백신으로 지구촌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2021년 2월에 한국 소식을 듣는다. 얼마 전 한 장관이 옷을 벗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 추운 겨울에 옷을 벗다니. 동상이라도 걸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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