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86. 사랑스러운 붙음

서 량 2022. 8. 24. 18:36

 

당신과 내가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윤회설과 인과응보 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12인연 법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고리를 연결한다. ①무명(無明) ②행(行) ③식(識) ④명색(名色) ⑤6입(六入) ⑥촉(觸) ⑦수(受) ⑧애(愛) ⑨취(取) ⑩유(有) ⑪생(生) ⑫노사(老死).

이런 한자어로 우리를 압도하는 묵직한 문자들 때문에 주눅이 들지는 말거라. '①무지 ②행동 ③의식 ④명색 ⑤6개 감각 ⑥만지기 ⑦받기 ⑧사랑하기 ⑨갖기 ⑩존재하기 ⑪태어나기 ⑫쇠퇴하기'라고 쉽게 풀면 고만인 것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춤추듯이 돌아가는 이 삼라만상의 변천 과정에 애착이라는 현대심리학 용어를 적용시키는 학구적인 작업에 몰입하기로 한다. 애착은 '⑥만지기 ⑦받기 ⑧사랑하기 ⑨갖기 ⑩존재하기'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당신과 내가 유심히 관찰하는 인생이라는 무대의 왼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영국 태생 아동심리학자 존 보울비(John Bowlby: 1907~1990)가 평생을 천착한 애착이론(Attachment Theory)이 근래에 정신심리학자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프로이트가 제창한 저 피비린내 나는 살부(殺父) 문화에 반하여 매우 평화롭고 매력적인 정경이다.

'세 살 때 버릇이 여든 살까지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빠르게는 똥오줌을 가릴 줄 아는 3살 나이, 좀 더 여유 있게는 부모의 눈치를 살필 줄 아는 6살 때쯤 우리의 성격 형성은 일찌감치 그 뼈대가 굳어지는 법이다.

애착이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보울비는 3살 때까지의 유아가 경험한 엄마와의 '사랑스러운 붙음(愛着)'이 평생을 지배한다고 주창한다. - 애착이라는 한자어를 굳이 피하고 '사랑스러운 붙음'이라며 순수한 우리말을 쓰는 내 고집을 당신이 이해해 줬으면 하는데. - 남녀가 '붙는다'는 표현이 짐짓 군자연하는 당신의 따분한 생각처럼 그렇게 저속한 말은 아니다. 남녀가 '애착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느냐?

이 세상 그 누구도 엄마와 완벽한 애착상태를 이루는 사람은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예행연습도 없이 이루어지는 발육 과정 동안 우리는 오로지 큰 손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만 굴뚝 같을 뿐. 이 못다한 사랑의 후일담을 추적하는 보울비의 후계자들은 심지어 성인 남녀의 사랑 관계에까지 애착이론의 원칙을 적용시키고 있다.

서로 좋아하는 성인 남녀 사이에는 안정감의 추구, 불안정을 타파하려는 몰입 성향, 불안정한 상태를 거부하는 행동, 두려움으로 인한 회피 같은 네 가지 종류의 애착상태가 불거진다는 이론이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열렬히 시청하는 모든 한국 TV 드라마가 거의 다 이 숨겨진 각본에 따라 제작되는 내막에 대하여 생각한다.

'attachment (애착)'는 14세기에 라틴어와 고대 불어에서 '체포영장' 또는 '구속영장에 의한 재산 압수'라는 뜻이었다. 하하, 이건 근래에 한국에서 범람하는 검찰의 직분 또는 직책을 묘사하는 말이다. 당신도 나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검찰의 기능이 애착심에 그 강력한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attachment'에는 18세기에 들어서서야 '동정심(sympathy)' 또는 '부수적인 감정'이라는 뜻이 생겨났다. 이메일에 죽자고 매달리는 나와 당신이 신경을 쓰는 '첨부파일' 또한 'attachment'라 하지. 기왕이면 '애착파일'이라 번역하면 어떨까 하는 정신과적인 발상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만큼 '사랑스러운 붙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미와 아기 간에, 좋아하는 남녀 서로 간에 사랑이 넘치는 구속영장을 주고받으며 상대를 체포하는 기쁨과 아픔에 빠지는 정신상태를 본다. 이토록 봄비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쏟아지는 주말에.

 

© 서 량 2017.05.14

--- 뉴욕 중앙일보 2017년 5월 17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17/05/16/society/opinion/5267084.html

 

[잠망경] 사랑스러운 붙음

당신과 내가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윤회설과 인과응보 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12인연 법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고리를 연결한다. ①무명(無明) ②행(行) ③식(識) ④명색(名色)

news.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