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hotel), 병원(hospital), 주인(host), 적개심(hostility), 또는 볼모(인질: hostage)의 말 뿌리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hospital'에서 파생된 'hospitality'는 '융숭한 대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경건한 말 속에 '적개심'이라는 의미가 숨어있다는 말인가.
고대 라틴어 'host'는 '다수'와 '적'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소수에게 다수는 항상 적이었다. 'host'는 낯선 사람 외국인을 뜻하는 'hostis'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저절로 짧아진 단어이다. 그러니까 다수뿐만 아니라 타인이나 외국인도 적으로 취급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어른들의 잠재의식을 대변하는 어린애들 말에도 내편은 '우리 나라' 나를 못살게 구는 적은 '남의 나라'라 하지 않는가. 7개월쯤 된 갓난아기가 낯선 얼굴을 보면 소스라치게 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host'에서 'hostility(적개심)'란 단어가 파생된 것은 15세기 무렵 프랑스에서 'host'라는 단어가 쓰인 이후이다. 낯선 사람은 적대감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한 학생이 다른 학교에서 전학 오면 그 애를 첫날 방과후에 강당 뒤로 데려가 텃세랍시고 주먹으로 때리곤 했던 것이다. 15세기의 프랑스가 아닌 20세기의 한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다수라고 적대시하고 낯설다고 적대시하고 이래저래 인간은 적대감정의 전문가임이 틀림없다. 사랑보다는 적대심이 팽배한 인간의 본성이여!
평안보다는 공포가 헤게모니를 잡는 우리의 본질이여! 중세가 되자 'host'에 '희생자'라는 뜻이 얹혀졌다. 적을 패배시키지 않는 승리는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안전과 복지를 위하여 우리의 적은 반드시 희생돼야 한다. 미국을 거꾸러뜨리겠다는 부질없는 꿈을 지닌 테러리스트가 무고한 민간인들을 인질로 삼을 때도 'hostage'라 한다.
백년 전까지만 해도 양키들은 '호텔'을 'hostel'이라고 했다. 요새는 짧게 'hotel'이라 한다. 현대영어에서 'host'는 '손님' '방문객'이라는 의미 말고도 '주인'이라는 뜻도 있다. 옛날에 호텔 주인들은 호텔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말도 술집 여주인을 주모(酒母)라고 했지만 요새는 'host' 의 여성형인 'hostess'라 일컫는다.
'host'의 뜻이 주인도 되고 손님도 된다는 역설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상상의 타임 머신을 타고 500년 전 중세기로 거슬러 가보기로 하자.
당신은 현대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고대영어를 하는 유럽의 백인들이 '주인'과 '손님'을 딱 부러지게 분별하지 못하면서 살고있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동양의 거성 장자도 자기가 나비인지 나비가 자기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비몽사몽의 순간이 있었노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평생을 꿈과 현실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살아가고 있다. '손님'과 '주인'과 '외국인'과 '인질'과 '다수'와 '적'과 '병원'과 '호텔'과 '적대감정'이 뒤범벅된 의식상태를 아침 저녁으로 맞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미국에 이민 와서 단지 생김새가 몹시 다른 외국인이라고 숱하게 적대시 당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를 겹겹이 에워 싼 다수의 양키들을 적대시하면서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언제부턴가는 '손님'으로 온 우리들이 '주인'이 되는 시기에 들어선 작금의 출중한 현실이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더더구나 슬픔과 기쁨이 범벅이 되어 이민생활의 한해가 또 한 번 철커덕 넘어가는 연말쯤 해서는.
© 서 량 2006.12.13
-- 뉴욕중앙일보 2006년 12월 27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06/12/26/society/opinion/4466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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