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의 詩모음 158

플라스틱 나무 밑에 둔 심장 / 김종란

플라스틱 나무 밑에 둔 심장 김종란 *고도를 기다리며 슬픔을 선정한다 달콤한 슬픔 쌉쌀한 슬픔 아이스크림 두 손에 쥐고 대열을 빗겨 지나간다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온다 차오르는 시간 품어내고 품어내며 어김없이 뛰는 심장 플라스틱 나무 위로 해가 떠오른다 브람스를 선정한다 유연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탈색된 거리 내달린다 심장은 달콤한 아이스크림 스르르 녹아 내리며 플라스틱임을 잊는다 기다리며 온기 없음을 합성이라는 걸 잊는다 *사무엘 베게트의 희곡 © 김종란 2009.11.30

이 기차엔 비상약이 없다 / 김종란

이 기차엔 비상약이 없다 김종란 오후와 저녁 밤을 가로지르며 목쉰 소리를 내지르는 이 기차엔 승객이 없다 매캐한 연기 통로에 항상 낮게 머물러 메마른 눈 기차는 너무 빠르거나 느린지 아무도 볼 수 없다 어둠을 뚫고 가면서 형제를 만나는 생각을 했다 장방형 식탁에 팔꿈치 고이고 뜻 없는 이야기 주고 받는 겨울나무 밑 수북이 떨어진 마른 열매 하나 낙엽 기대어 뒹구는 시간을 이 기차는 형제를 만날 역전에 서지 않는다 너무 빠르거나 느려서 나는 그들을 볼 수도 없다 함께 자라난 초원 함께 손잡은 형상에 골몰하며 아주 오랜 시간 뒤 그 역을 다시 지나간다 낡고 다정한 역사(驛舍) 오후의 햇살을 받는 화단엔 그려 넣은 그들이 서있다 뒷모습 혹은 옆모습으로 자꾸 덧칠해서 알 수 없어진 감정의 선을 면도날로 긁어 내..

프린트 / 김종란

프린트 김종란 길 조용하다 흑백의 나무들과 잡목 숲 사이로 길은 완만하게 구부러져 있다 흰 길이다 나무들은 두텁고 부드러운 질감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낯익은 그 길을 들여다본다 온밤 지나 새벽녘 지나 아침으로 찍혀 나오는 회색 안개 묻힌 얼굴들 어깨를 부딪힐 때도 모호하게 일별하며 잘라지는 따뜻한 흰 모래일까 바짝 다가선 길 인쇄되면서 길은 희게 반짝인다 © 김종란 2009.11.17

포장의 기술 / 김종란

포장의 기술 김종란 두 입술의 포장, 잠시 멈추시면 형광 빛으로 포장해드립니다 두 눈의 포장은 날고기 빛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잠시 감으세요 비린내 나는 곳에서 살게 해드리겠습니다 머무르세요 태엽을 감아드리겠습니다 비릿한 것이 좋아 단숨에 포장되는 기분 어떠십니까 그는 불을 맞았습니다 불이 활활 타고 있습니다 불 타오르는 그는 바비돌 케이스에 들어갔습니다 투명하게 바라봅니다 포장되었습니다 명세서와 인증이 붙여집니다 봉인 되어서 납품일을 기다립니다 (재고창고가 붐빈다는 소문) © 김종란 2009.11.13

고양이가 사는 집 / 김종란

고양이가 사는 집 김종란 누군가 떠나는 것에 대해 말해주었으면 떠나보라고 말해주었으면 고양이는 집에 들어와 때론 기지개 펴며 창틀에 앉아 노곤한 해바라기 불현듯 어른대다 사라지는 뜬 소식에 졸음이 쏟아져 안경이 코밑에 걸린 안주인을 지켜보며 우아한 꼬리를 부드럽게 펼 수 있는 작은 공간 깃털에 젖은 밤이슬 털어내며 나뭇잎 사이를 날아올라 사고뭉치 이 장난감 새들 내가 바라볼 때 제발 최면에 걸리시라 안하무인 내 거드름에 푹 빠지시라 내가 떠났더라도 잊지 않기를! © 김종란 2009.11.12

진양조의 공간 / 김종란

진양조의 공간 김종란 당신은 가두지 않겠어요 바람 부는 곳 눈 내리는 곳 낙엽 지는 곳에 있어요 지켜 보고 있어요 비인 곳 까마득한 산불 일어 미세하게 느리게 침묵하는 것들은 함께 흔들리어 늦은 볕 아래 투명하게 불 붙다가 텅 비어져요 산뜻하게 베어져 이 빈터에 놓이네요 잠시 눈시울에 머뭇거리다 흘리지 못해 반짝 빛나다 별빛 아래 물기 듬뿍 머금은 흰 국화(菊花) 사라지는 것을 은유(隱唯)하며 이 비인 곳을 지나네요 *국악의 가장 느린 장단 © 김종란 2009.10.21

시선의 끝 *히비스커스 / 김종란

시선의 끝 *히비스커스 김종란 깊은 그늘 틈틈 물기 흐르는 큰 붓으로 지워진 빈 계단 차콜의 대담한 선 어슷비슷 지어진 오래된 미술학교 어슷비슷 비어 있음! 드러난 순식간의 이름, 이름, 그림자들 불러들여 이름과 이름 달려 와 어둠의 등 등 등을 굽혀 깊은 그늘, 가장 어두워 비어있는 곳마다 드러나기도 하는 마릴린 몬로의 입술 비우다가 지어진 히비스커스 *로스코 채플, 너무 어두워 눈물 빛줄기로 쏟아지며 묵직한 붓의 움직임, 그 시선이 가는 * Hibiscus/하와이 무궁화, 꽃말: 섬세한 사랑, 신비한 사랑 ** Mark Rothko Chapel 시작 노트: 오규원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를 읽으면서 아 그런 시를 쓰고 싶다, 깊고 단순하고 투명한 시! 하다가 제가 매일 만나는 미술학교 ..

간결한 식사 / 김종란

간결한 식사 김종란 껍질 채 깎이어 향기로운 잼(jam)이고 싶어요 주황색 심장이 설탕 안에서 녹고 있군요 부드럽고 달콤하게 까칠하고 어려운 마음 투명한 유리병에 보이네요 살아서 한없이 구겨져 있으니 흰 접시위에 갓 구워 낸 생각 한 조각 놓아 보세요 다 녹아들지 못해 약간 씹을 수도 있는 쌉쌀한 마음 올려 놓지요 바닷가에서 어울려 노는 바람들 모아 차를 끓였어요 간결한 식사 깎이고 구겨지면서 쌉쌀하게 그러나 달콤하게 흰 도자기 잔에 담긴 바람에 가 닿는 부르튼 입 붉은 입 © 김종란 2009.10.16

가을 책 / 김종란

가을 책 김종란 아직은 다 읽지 못한 책, 가을 다시 받아 들고 손끝으로 지난 지문들을 더듬어 익히며 옛 향기 흠, 흠 들이마셔 가슴에 품어보고 마음의 어둑한 서고에 가지런히 꽂아 보기도 하고 미쳐 넘겨보지 못한 채 멈춘 그 페이지 그 生生한 우울에서 시작해 크고 검은 눈망울이 뚜렷한 엉클어진 짧은 머리 큼직한 배낭을 매고 소매엔 약간 때가 묻은 분홍빛 손 꿈꾸는 너 다시 만나 불 붙어도 향기로운 가을 나무 곁을 익숙한 발자국으로 머무르던 곳 서성이던 곳을 지나치며 손가락에 침을 묻혀 넘기는 오래된 책 석양의 시간은 멈춰진 듯 느리고 붉다 이야기의 끝을 향해 더욱 선명하게 가을은 변주된다 웅크린 어둠은 저 곳에 머물게 하고 오래된 이야기 책 빛으로 지금 지나는 우리에겐 처음인 이야기 이 아까운 이야기에 ..

의자와 시계 고양이 / 김종란

의자와 시계 고양이 김종란 시간과 시간 사이에 놓여있다 흐름이란 다른 공간으로 사뿐히 뛰어넘는 것 깜빡 살아나는 빛을 감지한다 동공 깊숙이 세계와 나 고풍의 유리창은 예의 바르게 닦여 있다 침묵의 구름 노회(老獪)한 나무 곁 없는 듯이 머문다 소리를 너에게 건넨다 사람 가득 차 붉은 무리의 빛이 시야의 끝에서 잠시 흔들리듯 의자에 앉아 초침 소리를 바라본다 빛은 깜빡 진다 © 김종란 2009.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