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의 詩모음 158

퍼즐 / 김종란

퍼즐 김종란 분해된다 선택한 곳 마음 한 구석 낯선 곳에서 꿈꿔왔던 곳에서 사라지는 주홍빛 섬광에 손 뻗으며 나의 무수한 마천루 검은 예복의 그림자들 멈춰선 앰뷸런스 블록을 가로질러 점령한 빈 트럭 흩어져 나는 분해되어져 흐릿해지는 빛에 순간 겹쳐진다 통행이 혼잡한 이곳에서 예정된 빛은 숨고 쓴웃음 머금은 숫한 분신들 매혹의 카드 뒤에 숨고 이제 그림자 숲 잃어버린 눈(眼)을 찾는다 연한 회색빛 잊어버린 퍼즐 조각이다 © 김종란 2009.09.11

검은 소는 없다 / 김종란

검은 소는 없다 김종란 검은 손이 옆구리 곁에 슬몃 비친다 검은 꽃은 언제부터인가 검은 소의 고삐를 틀어쥐고 있다 빛이 쏟아져 검은 꽃 끝없이 스며들어 빛은 이제 검은 꽃 검은 소의 눈은 희다 흰자위로 드넓다 검은 손이 지나가는 검은 꽃 푸른 혈관의 그물에 걸려 있다 무릎이 희게 헤어진 검은 소 뒤로 뒤로 아득히 물러나며 검은 꽃은 피어나서 고삐를 쥐고 있다 낮 낮 낮과 밤 밤 밤과 밤낮 푸른 피의 그물 안에 피어나는 검은 꽃은 고삐를 쥐고 있다 © 김종란 2009.08.31

잎속의 입 / 김종란

잎속의 입 김종란 말 하려 하는 잎 춤추는 빛, 둘러싸여 겹겹이 흔들리는 일에 대하여 말 하려는 감춰진 입 바다가 오듯 불현듯 손에 닿을 듯 잎속의 잎, 잎속의 입 눈 앞에 일렁이는 녹색 파도 말하듯 잎에 닿을 듯 회색과 붉은 색으로 거칠게 칠해진 배, 그 붙잡는 세밀한 음향은 보이지 않게 배를 흔든다 파랗게 바다는 움직이고 백사장은 눈부시다 © 김종란 2021.04.29

가방 속 이야기 귀뚜라미 / 김종란

가방 속 이야기 귀뚜라미 김종란 손잡이 꽉 쥔다 뒤집어 털어본다 의아해하는 낡은 연분홍 가죽 보드라운 손 먼지 이야기 하는지 부드럽고 귀뚜라미 소리 떨어진다 *아일랜드에 도착할까 웃음을 삼키며 보관되는 시간 무연고 음악 잊어 버리는 음악 해시계 안 서성거리는 귀뚜라미 멈출 때까지 배고프지 않음 아무렇지 않음 등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건다 신호를 보낸다 이제 커브를 돌아야 하는지 부드럽고 강인하게 네가 지켜준 시간의 대패밥이 쌓여 간다 손잡이를 꽉 쥔다 *제임스 조이스와 오스카 와일드의 Ireland.IE 시작노트: 가을 문턱에 들어 섭니다. 바람과 빛의 농도가 변하고 창 밖을 가끔 바라보며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 빠지는 황금빛 시간, 곁에 있는 낡은 가방에게 너는 어떠냐고 묻고 싶어지는 마음으로.

*하오의 수련 / 김종란

*하오의 수련 김종란 물로 기록한다 물이 지었다 허물어 보는 입 물의 끈에 매어 여행하는 몇 겹의 우주공간 기록하며 빛이/ 쌓인다 여름 하오의 물빛이 어룽지는 고고학자의 깊은 눈길 빛을 들이켜며 물/ 깊이 서서 우주를 오간다 습기를 모아 몸을 짓고 물방울 하나 걸어 놓다가/ 밀림으로 갔다 **루소의 밀림 꿈의 밀실에서 푸른 빛 흰 빛으로 꿈 속의 꿈을/ 바라 본다 붓 끝에 유화 물감 속에 가 닿은 코 끝 사막을 지나는 모래 폭풍/ 둥근 그 바퀴에 잠시 고인 턱 대상을 향한 유연한 물의 자세 휘청이는 달을/ 향해 짙어지는 물의 맛 은하려니 저수지려니 박물관이려니 하며 입이/ 없어지고 발이 사라지고 팔이 흐려지는 중독의 시간 물은 찬란하다 * 정오에서 밤 12시 까지의 시간 ** 앙리 루소, 프랑스 화가 시..

나폴리 제과점 / 김종란

나폴리 제과점 김종란 냄새, 객기, 웃음의 순례길 크림빵, 단팥빵, 사라다빵 베어 물며 사납게 달콤하게 웅성거리다가 왁자지껄 웃으며 올라타는 전철 연탄재 빛 매캐한 서울, 1962 남아있는 나폴리 눈빛 보리차 잔에 부딪히는 나폴리 파란 물빛 한가한 나폴리 하늘빛 젊은 시절 *알 파치노가 창밖 지나다 검은 눈으로 바라보는 나폴리 시간 *이탈라아계 미국인 배우 시작 노트: '나폴리 제과점' 소리 내면 들리는 뉘앙스, 나폴리 제과점 이야기 듣다 상상 속 나폴리 냄새 맡으면 그 객기, 웃음 소리, 전차 소리, 김승옥 의 '서울 1964년 겨울', 젊은 시절 알 파치노의 검은 눈, 나폴리 하늘에 일렁이는 우리들의 이야기. https://news.koreadaily.com/2022/07/15/life/artcult..

블루진 / 김종란

블루진 김종란 블라인드 틈으로 밀려오는 여름 뭉개진 초록 흔드는 미풍, 블루진 메모리얼 데이, 바다, 흰 모래톱, 블루진 에릭 사티에서 드뷔시로 흐르는 피아노 곡에 묻힌다 바다가 클로즈업 된다 2B 연필심을 손 끝으로 가늠하면서 실눈을 뜬다 블루진 통바지를 입고 마음껏 가늘어 지며 굽 높은 초록, 코에 흰구름이 맞닿는다 첨벙 바다에 뛰어드는 소리 초록의 가지에 앉아 막연히 소매를 접는다 시작 노트: 마음에 휴가를 보내고 싶었지요 얽매이지 말고 깊이 빠져 보라고 바다를 그리려다 바다에 빠져 심해에 가 닿아 시간을 잊듯 여름 그리고 블루진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초록 © 김종란 2022.05.31 https://news.koreadaily.com/2022/06/03/life/artculture/2022060..

빛이 몸에 우유를 들이붓듯 / 김종란

빛이 몸에 우유를 들이붓듯 김종란 출렁이는 구름 연두색으로 개화하는 잎들 초록으로 가는 기적소리 아직 고치 안에 잠들었다 음악 듣고 차 마시며 연두색 세상을 본다 흰 구름 나지막이 드리우는 창 창 안에서 잠든다 잠 드는 걸 학습한다 *바벨의 도서관 장난감 병정들, 줄 서다 쓰러지며 서로 기댄 끝없는 책들 시간이라 명명되는 불확실성 속에서 펼쳐보는 땅을 한걸음 한걸음 밟고 걸어나간 그대 내면의 소리 숨 쉬는 활자, 공기 속에서 꿈 속에서 물음 속에서 날아든 말의 홀씨, 발아된 음표, 몸을 살면서 기록해둔 내밀한 개인의 일지, 울부짖음 병약함 의혹 한 겹 한 겹 젖히면 미소와 활기 믿음 꽃잎이 겹치듯 피어나 무리져 만개하는 빛과 어둠이 함께 일렁이는 모자이크 기록한다 창 밖이 얼마나 연두인지 울음이 끝, 숨..

달맞이 꽃 / 김종란

달맞이 꽃 김종란 저녁 무렵 고개를 드는 너 손으로 꽃봉우리를 건드리면 무성영화 속에서 오롯이 피어나네 어두워서 더욱 노란 비명 노란 소리, 너의 뚜렷한 속삭임 네가 숨어있는 세상 밤이슬 젖은 도둑 모습이네 은은한 빛의 낙서 언저리로 잔 기침소리 들리네 멀리 까지 들리는 너의 샛노란 울음소리 © 김종란 2021.9.15 https://news.koreadaily.com/2022/04/08/society/opinion/20220408171357977.html [글마당] 달맞이꽃 news.koreadaily.com

휘어지는 시간 / 김종란

휘어지는 시간 김종란 휘어지는 나뭇가지, 휘어지는 시간 휘어지는 길, 뜨거운 Singapore 햇볕에 싱싱하게 휘어지며 반짝인다 *사영, 그림자 너머의 시간으로 손을 뻗는다 **초끈으로 매달려 흔들리는 열린 시간 차원의 문을 열고 열고 또 여는 타임 트래블 꿈을 꾼다 시간을 뒤섞으며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입을 막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 시간의 문을 닫는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는 사영(그림자)만 보고 있다는 철학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 우주를 10차원 시공으로 보는 이론 © 김종란 2022.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