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량 488

|詩| 무의식

무의식 -- 마티스 그림 “휴식하는 댄서”의 여자에게 (1940) 나뭇잎새가 가리는 벽 목탄화 캔버스 앞 빨간 머리 여자 얼굴이 늠름하기만 하다 기하학 원칙을 쫓으려는 새까만 바닥 옆 이등변 삼각형 다리가 아주 버젓해 그치 詩作 노트: 마티스 그림에 여자 얼굴을 살펴보면 말이지 드물지만 아주 늠름하고 떳떳한 표정이 있다 © 서 량 2023.12.23

|詩| 입술 언저리

입술 언저리 -- 마티스 그림 “보라색 볼레로 블라우스”의 여자에게 (1937) 눈 속에 듬뿍 찬 눈동자 까만 눈동자 옅은 그늘 엷게 어리는 목 여자의 목 흰 치마폭 굵은 주름이며 오른손 위 왼손이 부드럽다 보라색 볼레로를 부추기는 빨간 립스틱도 詩作 노트: 이 마티스 그림 속 여자는 눈이 황소처럼 보인다. 블라우스는 투우사가 입은 볼레로 조끼처럼 보여. © 서 량 2023.12.21

|詩| 눈이 큰 금붕어

눈이 큰 금붕어 -- 마티스 그림 “금붕어와 함께 벗다”의 여자에게 (1922) 환하다 금붕어 여자의 몸 명암이 뚜렷한 주홍색 살색 금붕어 세 마리 중 하나만 눈이 참 커요 좀 튀어나온 금붕어 눈을 잘 점검하는 여자의 눈 조그만 원형 탁자 위에 붉은 과일 오롯이 얹혀 있는 가운데 詩作 노트: 이 마티스 그림은 슬쩍 보아도, 자세히 보아도 좀 현혹적이다. 금붕어도 벌거벗은 여자도 자기네들이 그런 줄 모르는 가운데. © 서 량 2023.12.17

|컬럼| 456. 이상한 시추에이션

골동품상을 운영하며 혼자 사는 이혼녀가 말한다. “당신이 하는 어려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를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잘난 척하는 태도도 기분 나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안될까요?” 하니까 이런 응답이 나온다.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거든요. 외출 후 아파트에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내게 뛰어옵니다. 이곳에 내가 도착할 때마다 그런 식으로 반겨줬으면 좋겠네요.” 그녀와 내 마음의 결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반가워 꼬리치는 강아지처럼 애정 있는 분위기를 내가 풍기지 못한 거다. 그런 멘탈 이미지에 그녀는 강한 애착심을 품고 있다. 존 보울비(John Bowlby: 1907~1990)는 ‘애착이론, Attachment Theory’으로 정신상담 발전에 크게 공헌한 영국 정신분석가. 그..

|詩| 만돌린의 태도

만돌린의 태도 -- 마티스 그림 “따바 로얄” 여자에게 (1943) Tabac Royal 따바 로얄 Royal Tobacco 흰 꽃병에 검정색 텍스트 참 귀족적이지 그치 깔끔한 콧수염 담배 냄새 샛노란 도어 옆 의자에 앉은 새하얀 드레스 여자 무뚝뚝한 만돌린 둘이서 대항하는 중이예요 부동자세로 詩作 노트: 마티스 그림 구성의 엉뚱한 면이 마음에 든다. 화가나 시인이나 좀 엉뚱한 데가 있어야 한다. © 서 량 2023.12.07

|詩| 눈빛

눈빛 -- 마티스 그림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의 초상화”의 리디아에게 (1947) 어쩐지 웃고 있는 눈 노랑 파랑이 반반씩 차지하는 빛깔 절반 정도는 정말 말로 하기가 쉬워요 오렌지색 배경 초록빛에 싸여 긴장하며 진동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참 따스합니다 詩作 노트: 러시아를 혈혈단신 탈출한 리디아 델렉트로스카야. 1932년, 22살에 마티스 스투디오의 도우미로 고용된다. 그녀는 1941년에 소장암 수술을 받은 후 마티스가 불편한 몸으로 활동을 계속하다가 84살에 사망한 1954년까지 그의 곁에서 20여년동안 스투디오와 갤러리를 운영한다. 둘의 나이 차이는 40살. 마티스의 부인은 1939년에 가정을 떠난다. 시베리아 소아과의사의 딸 리디아. 파리 소르본 의대를 다니다가 학비를 대지 못해 중퇴한다. 마티스의..

|컬럼| 455. 문 닫고 지내기

문이 있고 통로가 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잔디밭 돌길. 문이 반쯤 열려 있는 서재를 지나 반들거리는 복도가 부엌에 이른다. 문은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칸막이를 상징한다. 문은 외부자극을 차단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오피스 문을 닫은 채 직장이나 연구실에서 열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 추구하는 작업에 심취하여 몰아(沒我)의 경지에 빠지는 과학자나 예술가들은 남과 소통하고 싶은 기색을 도통 보이지 않는다. 페이퍼워크가 산더미로 쌓인 병원에서 컴퓨터를 두들기는 중 전화가 온다. 오래 소식이 없던 친구가 어떻게 지내냐 묻는다. 야, 나는 날이 가면 갈수록 ‘자폐증상, autistic symptom’이 도지는 것 같다, 하며 농담을 내뱉는다. 현대인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낸다. ..

|詩| 산뜻한 절망

산뜻한 절망 아찔한 색채감으로 말하고 싶었다 낙엽이 땅에게 덤벼드는 모습을 희희낙락 보여주고 싶었지 소멸은 광활한 기쁨 물안개 피어나는 몸부림 오른쪽 발을 철썩 내딛는 희열 흩어지는 물방울 모습 잎새의 슬로우 모션 자포자기는 참으로 화사한 색채감이에요 詩作 노트: 14년 전 말투를 뜯어고치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겉모양을 바꿨더니 속 내용도 달라진 느낌인데. 글쎄다. © 서 량 2009.04.07 – 2023.11.24

2023.11.24

|詩| 가을 냄새

가을은 갓 끓인 누룽지, 널브러진 이부자리, 가을은 비 내리는 한밤중 당신 심층심리다. 속 깊은 바닷물결에 전후좌우로 몸을 흔드는 미역줄기, 주홍색 햇살 넘실대는 하왕십리 행당동 지나 뚝섬 길섶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도마뱀의 신중한 동작, 가을은 내 몸 냄새다. 씹지 않아도 저절로 씹어지는 군용건빵의 텁텁함, 새벽 4시에 창문을 열면 왈가왈부 할 것 없이 왕창 쏟아지는 분홍색 초록색, 가을은 빛살 가득한 당신이 얼마 후 부드러워지는 기운이다. © 서 량 2022.09.05 - 2023.11.21 詩作 노트: 고전적 취향에 젖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을은 언어습관에 지나지 않을 뿐. 향기라는 단어선택이 잘 맞지 않는 가을이 나를 지나친다.

2023.11.21

|詩| 안락의자

안락의자 -- 마티스 그림 “까만 옷을 입은 노란 안락의자의 젊은 소녀”에게 (1935) 오른쪽 위쪽 연분홍, 연분홍 하늘 아래로 퍼지는 빛, 빛 뭉치 올리브 색 잎새 아래로 넘치는 midnight 블루 노란 의자에 누워서 꼼짝달싹하지 않는 여자 왼쪽 팔을 길게, 길게 옆으로 뻗은 채 詩作 노트: 마티스는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면, 흥미진진하게 자유롭고, 조용하고, 혼자였다.”라고 말한다. 내가 시를 쓸 때도 그렇다. © 서 량 2023.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