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량 488

|詩| 한글과 알파벳

한글과 알파벳 生時, 生時스러운 꿈, 미국여자가 말한다. 세종대왕이 쌍비읍과 쌍지읒의 합성어를 제작했다는 거. 요새 한국인들이 그 텍스트를 싹 무시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 창밖 주홍색 구름이 그거 매우매우 맞는 말이라 소리치네. 우렁차게. 젊으신 어머니, 좀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하시네. 내가 미국여자에게 말한다. “영어도 사라지고 있어. 알파벳이 뭉글뭉글 없어지고 있어.” 夢! 夢! 夢! 배경음악이 울린다. 혼성사중창.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뭉그러지네. 조용하게. 詩作 노트: 영어와 한국어를 되도록 섞어서 말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이중언어를 둘 다 잘 못한다. 영어가 더 편하다. 미안하다. © 서 량 2024.01.26

2024.01.28

|컬럼| 459. 심리치료

… 상징의 의미를 아무리 건드려 보아도/ 상징은 다시 살아나지 않음을/ 뒤늦게 전해드립니다/ 상징은 상징끼리만/ 오래 내통해 왔음을/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2001년 본인 詩, 「사고현장」 나는 약물치료에 치중하는 정신과의사를 ‘druggist, 약사’라 부른다. ‘druggist’라는 앵글로색슨어는 ‘pharmacist’라는 라틴어보다 소탈하게 들리지만, 길거리 마약도 ‘drug’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어감이 좋지 않다. 되도록이면 심리치료에 의존하는 정신과의사를 ‘psychotherapist’라 한다. 약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체인 반면, 심리는 추상적인 컨셉이다. 약을 신봉하는 의사를 ‘유물론자, materialist’, 심리치료를 추구하는 의사를 ‘유심론자, mentalist’라 부르면서 유사시..

|詩| 빛기둥

빛기둥 -- 마티스 그림 “분홍색 드레스의 소녀”에게 (1942) 빛 몇몇 빛 뭉치 초록 기둥에 대항하는 눈금 검정색 가느다란 눈금의 힘 눈 코 입이 없는 분홍색 여자의 힘 덜커덕 공중으로 뜨는 의자 육중한 안락의자의 힘 詩作 노트: 1942년 어느 날 눈 코 입이 없는 마티스의 여자가 안락의자 끄트머리에 앉아 손으로 의자를 짓눌렀다 © 서 량 2024.01.19

|詩| 동맥피

동맥피 -- 마티스 그림 “모피 코트”의 여자에게 (1936) 여자 몸을 덮고 있잖아 주홍색 구름이 지열을 끌어들이는 구름이 숨이 콱콱 막히게 두툼하다 무더운 무릎이 의자를 휘감아 오르는 여린 소망이 왼손 위에 얹혀있는 오른손이 두툼하다 숨소리 들리잖아 칙칙한 숨소리 詩作 노트: 여자가 모피를 몸에 걸치면 동맥피가 떠오른다 그래서 마티스는 여자 치마를 새빨갛게 그린다 ©서 량 2024.01.15

|컬럼| 458. 꼰대

초등학교때 ‘김대곤’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별명이 ‘꼰대’였다. 놀리기 좋아하는 또래들이 ‘대곤’을 ‘곤대’라 거꾸로 부르다가 꼰대로 바꿔 불렀던 것이다. 꼰대가 어른이나 아버지를 뜻하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왜 그 말이 우스웠는지 잘 몰랐다. 마침 또 대곤이는 어딘지 어른스러운 데가 있는 아이였다. 같은 나이 친구를 꼰대라 불러대며 아버지를 연상하는 게 재미있었겠지. 네이버 사전은 ‘꼰대’를,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라 풀이한다. ‘꼰대스럽다’는 형용사를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는 데가 있다”고 해석한다. 꼰대들은 훈장기질이 농후한 노인네들이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믿는 사람들. 꼰대는 젊은이를 얕잡아본다. 때때로 깔보는 태도를 취한다. 연장자들이..

|詩| 화려한 배경

화려한 배경 -- 마티스 그림 “장식이 많은 배경의 화사한 모습”의 여자에게 (1925) 명암이 선명한 직사각형 여자 몸은 벽에 걸린 액자, 액자다 나른한 팔다리, 팔다리를 옥색, 하늘색 배경이 보좌한다 양탄자를 억누르는 대퇴근까지 詩作 노트: 마티스 그림을 감상하며 부드러움을 배운다 세상 모든 것들이 부드럽다고 느끼는 방법을 © 서 량 2023.12.30

|詩| 원색

원색 -- 마티스 그림 “줄마”라는 이름의 여자에게 (1950) 전신을 청색으로 가린 여자 pink색, pink색 desktop에 몸을 기대는 중 원색 서넛이 화폭을 탈출한다 세차게, 세차게 살색 병아리색 green색, green색 벽을 꽉 채우는 기대감, 기대감 詩作 노트: 이 마티스 그림은 아주 이상하게 부드럽다 여자 몸이 꼭 고속도로 같다 하늘로 치솟는 © 서 량 2026.12.27

|컬럼| 467. 시니어 모멘트

노인네들은 겸손하다. 남의 도움을 받고 싶은 본능적 몸가짐이다. 애써 자세를 바로잡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등허리가 굽어지는 모습이 마치 무슨 용서라도 구하는 태도다. 노인네들은 공손하다. 그들은 많은 말을 하고 싶다. 같은 말을 앉은 자리에서 되풀이 하거나 전에 했던 말을 하고 또 한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뜸을 들이며 쉼표 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 그, 왜, 저’, 하는 간투사로 언어공간을 메꾸는 사이에 상대방이 몸을 꼰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을 회고하는 것이다. ‘그때가 좋았어’,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당신은 현재보다 과거가 좋았다는 속마음을 내비친다. 가난과 곤혹에 시달리던 시절을 회상하며 웃기도 하고 ‘개고생’ 하던 군대생활을 떠올리고 무릎을 치며 공감한다. 그때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