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량 359

|詩| 아네모네 아코디언

아네모네, 아코디언 --- 마티스 그림, “아네모네와 함께한 여자”에게 (1937) 무릎 위로 펼쳐진 책 accordion 흰 건반 사이로 붕가붕가 울리는 검은 건반 소리 진분홍색 꽃덩어리 여자 왼쪽 이마에 안착하는 anemone 크게 뜬 왼쪽 눈 오른쪽은 반개반폐 半開半閉 빨강 줄무늬 세상이 붕가붕가 열리네 시작노트: 마티스의 그림을 눈을 반쯤 감은 채 음미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 그림 속 여자는 아네모네가 왼쪽 이마를 덮은 상태에서 오른쪽 눈을 반 정도 감고 있다. 세상이 반개반폐 상태일 것이다. © 서 량 2023.05.21

|詩| 대각선

대각선 -- 마티스의 그림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1926) 저 삐딱한 자세를 보세요 촘촘한 격자무늬 쑥색 암체어에 숨겨진 함정 검푸른 구름으로 무릎을 가린 여자 벽돌색 바닥에 오른쪽 발바닥을 대고 *아포칼립스를 기다리는 갸름한 얼굴을 *Apocalypse: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세상의 종말 시작 노트: 마티스가 화폭에 담은 여자들 중에 무심한 표정의 여자들이 많다. 나는 여성이라는 정치적인 표현보다 여자라는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 그림 속 여자는 세상의 종말이 와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얼굴이다. © 서 량 2023.05.19

|詩| 푸른 수첩

푸른 수첩 -- 앙리 마티스 그림, “책 읽는 여자”에게 20C 꽃병에서 눈을 떼는 순간 꽃병이 사라진다 재밌지 꽃병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거 빨간 꽃의 만개 턱을 괴는 당신의 두툼한 하박근 글자가 없는 책 하얀 책 광채 금방 밑으로 떨어질 듯 없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 푸른 색 커버 삼성 휴대폰도 시작 노트: 꽃이 있다 없다 하는 명제에 시달린다. 그림 속 여자의 실체마저 의심한다. 있고 없음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마음가짐이 재미있어진다. 마티스의 책 읽는 여자가 시대를 뛰어넘는다. © 서 량 2023.05.15

|컬럼| 441. 미국식 교장 선생

옛날에 육군 군의관으로 임관하기 전 훈련병 시절 스트레스가 심했던 기억이 난다. 병동 입원환자들의 단체생활을 보면서 가끔 일어나는 연상작용이다. 단체의 스케줄에 따르는 삶은 자유행동의 여지가 별로 없다. 기상, 취침, 프로그램 참가, 식사 시간이 늘 일정하다. 아침마다 거행되는 ‘community meeting’도 그렇다. 고리타분한 번역으로 ‘반상회(班常會)’, 또는 그냥 ‘커뮤니티 미팅’이라 사전에 나와 있는 말을 나는 ‘조회(朝會)’라 부른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던 기억이 새롭다. 며칠 전 조회 시간에 ‘wheeling and dealing’을 화제로 삼았다. 노름꾼 사이에 유행했던 슬랭. 쉽게 말해서 ‘부정거래’라는 뜻. 정치가들 사이에 돈이 오가는 상황을..

|詩| 야자수의 원근법

야자수의 원근법 -- 마티스 그림, "창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여자"에게 (1921) 꽃빛 강물이 흐른다 꽃은 붉은 색 강물이 부르는 노래 무박자 無拍子 여자가 손에 잡은 활 바이올린 활 반으로 쩍 갈라지는 coconut 코코넛 열매 쪽빛 하늘이 일으키는 세포분열 뚜렷한 창문 윤곽이 샛노란 창문 밖에서 야자수 사이로 붕 뜨는 저 돛단배를 봐봐 시작 노트: 그림에서 소리가 난다. 악기를 보는 순간 다짜고짜 악기에서 소리가 나기도 한다. 대개는 박자가 없는 소리. 마티스의 이 그림에서 노골적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다. 야자수 나무를 배경으로 귀가 멍멍해지도록 크게 울리는 fortissimo, 포르티시모, 매우 세게. © 서 량 2023.05.11

|詩| 검은 눈동자

검은 눈동자 --- 앙리 마티스의 그림, “바이올린과 함께한 여자”에게 (1923) 숭늉색 책상 바이올린 활이 나를 채찍질하네 심한 손가락 연습 손가락 연습의 휴식 점점 커지는 여자의 눈동자 숭늉색 발목 동공확대 동공확대 그림이 벽 위에 쌓이네 바이올린 몸체가 사라지고 우주가 전 우주가 고요해지는 오후에 시작 노트: 한 여인이 바이올린을 배와 무릎 사이에 옆으로 세워 얹어 놓고 바이올린 활을 손에 쥐고 있다. 음악 연습을 시작하려다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지, 도중에 쉬는 중인지, 연습을 다 마쳤는지. 검은 눈동자에 동공확대가 일어난다. 마티스 그림 속 여자는 늘 모호한 분위기를 풍긴다. © 서 량 2023.0ㅈ5.05

|詩| 책과 파라솔

책과 파라솔 -- 앙리 마티스의 그림, ‘파라솔과 함께 책 읽는 여자’에게 (1921) 풀섶에 뒹구는 하늘색, 옥색 차양 넓은 내 모자를 보세요 국방색, 군청색 파라솔이 자외선을 막아요 당신 얼굴이 풍기는 복숭아 냄새 T셔스 앞 V자로 펼쳐지는 공간에서 책갈피, 책갈피 사이로 목걸이가 흔들린다 시작 노트: 으레 파라솔을 펴고 그 아래에서 책을 읽을 줄로 알았지, 이 여자가. 아마 흐린 날씨였겠지. 그래서 파라솔은 펼쳐지지 않았다. 책 읽는 여자를 훔쳐본다. 무슨 책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굵은 목걸이만 눈에 띌 뿐. © 서 량 2023.04.23

|詩| 허벅지

허벅지 -- 앙리 마티스의 그림, ‘꽃과 함께 앉은 여자’에게 (1942) 꽃가지 빼곡한 꽃병 하나에 의자 다리가 넷이네 S자 모양 팔걸이에 얹히는 꽃 마음, 꽃 마음 손가락이 없는 오른손, 연한 손길이 홍시 빛 도는 주홍 색이네 대퇴근 대단한 언저리에 널브러지는 흰색 노랑색 어느새 봄 기운, 봄 기운 시작 노트: 마티스의 색채감에 홀린다. 무르익은 홍시를 연상키는 여인의 허벅지 색 선택이 대담하다. 봄이 그런 경지에 몰입하려고 벼르고 벼르는 4월 하순에. © 서 량 2023.04.22

|詩| 진주 목걸이

진주 목걸이 -- 마티스의 그림 ‘검정색 배경 앞에 앉은 여자’에게 (1942) 진주 알맹이들이 둥둥 떠다닌다 Y 모양, Y 모양 당신 목 앞쪽이 추위에 떤다 암흑 속에 수많은 괄호가 숨어있네 괄호들이 옴짝달싹 않다가 이내 움직이기 시작하네 시작 노트: 텍스트가 시그널, 상징처럼 보일 때가 많다. 추상보다 비주얼 감각에 쏠리면서 사는 우리들. Seeing is believing! 모쪼록 글쟁이들은 환쟁이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은데. © 서 량 2023.03.23 https://news.koreadaily.com/2023/05/05/life/artculture/20230505175251380.html [글마당] 진주목걸이 진주 알맹이들이 둥둥 떠다닌다 Y 모양, Y 모양 당신 목 앞쪽이 추위에 떤다..

|컬럼| 437. Multiverse

2023년 3월 12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의 말레이시아 출신 ‘Michelle Yeoh’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카데미 95년 역사상 처음으로 동양 여성에게 주어진 여우주연상이다. 이 영화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개봉됐다. 우주, ‘universe, 유니버스’가 맞닿아 이루어진 다중(多重)우주, ‘multiverse, 멀티버스’라는 천문학설을 토대로 한 공상과학 스토리!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수많은 다른 우주에서 현세의 나와 공존하는 나를 생각한다. 성능 좋은 컴퓨터의 힘을 빌어서 나의 삶에 대한 동시다발적 기억을 더듬어 순식간에 시공을 여행하는 정황을 상상하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엄청난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