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량 358

|詩| 하늘색 책상

하늘색 책상 -- 마티스의 그림 “책 읽는 소녀, 꽃병”에게 (1922) 펼쳐진 책에 어둠이 깔려요 꽃병에 꽂혀 있는 꽃 꽃에 내려앉는 기생잠자리 반만 열려 있는 여자의 눈 내 무의식도 반만 열려 있다 등에 수직으로 꽂히는 무지개 머리 속이 가려워요 캄캄해 詩作 노트: 책을 읽을 때 절반은 무의식이다. 무의식이 제로인 상태는 정신건강에 안 좋아요. 마티스의 책 읽는 소녀 등에 수직으로 팍팍 꽂히는 무지개가 참 보기 좋다. 책을 건성건성 대충 읽어도 괜찮다. © 서 량 2023.06.07

|詩| 뭉툭한 손

뭉툭한 손 -- 마티스의 그림, "수영복 입은 여자"에게 (1935) J字로 시작되는 팔걸이 빨간 의자에 실비가 내려요 눈동자 손가락 아, 손가락도 없어 아랫배도 없는 여자 3月을 뒤로한 개나리꽃 빛 연두색 섞인 노랑색 배경이 두렵기는 하지 거의 검정색 입술도 줄이 죽죽 간 브라자도 詩作 노트: 의자나 테이블이 물체가 아닌 텍스트로 보이기도 한다. 마티스 그림의 여자도 그럴 때가 있다. 요컨대 물체는 선과 색의 싸움이다. 색이 스페이스를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선을 이긴다. 생물체는 특히 그렇다. © 서 량 2023.06.05

|詩| 간격 없음

간격 없음 --- 마티스 그림 “팔짱을 낀 여자”에게 (1944) 능선 산등성이 능선 눈동자 없는 새하얀 눈 양팔로 자신의 몸통을 붙잡는 순간 눈부신 하늘 바닷가 하늘을 기웃거리는 갈매기 갈매기 닿을 듯 말 듯한 여자의 입술 詩作 노트: 마티스의 곡선은 사뭇 경건하다.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건축물 같기도 하고. 그가 그리는 여자의 몸은 템플이다. 절이다. © 서 량 2023.06.03

|컬럼| 442. 낯가리기

에즈라는 기분장애와 성격장애가 심해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데다가 법적인 문제조차 겹친 결과로 내 병동에 오래 머문다. 그는 증세가 완화되어 퇴원을 바라본다. 뉴욕 북부 소도시의 ‘Community Residence, 지역사회 거주지’에서 받아주겠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기숙사 같은 곳. 그는 그곳의 삶이 엄격한 규율로 운영되는 폐쇄병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에즈라가 마음을 바꾼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퇴원을 하지 않겠다고 우긴다. 병동생활이 너무 힘이 든다며 시시때때 뗑깡을 부리면서 얼마나 자주 직원들을 괴롭혀 왔는데. 직원들이 아연실색하고 있다. 앓던 이빨 빠지듯이 일상의 행복지수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진다. 퇴원을 거부하는 이유인 즉, 생각..

|詩| 맨발

맨발 -- 마티스의 그림 “담쟁이덩굴 가지를 든 여자”에게 1906 앞쪽 오른쪽 절반을 잎새들이 기어오른다 그늘에 서서 눈길을 아래로 던지는 여자 당신 정신상태 90%가 보라색 도는 자줏빛 배 왼쪽 옆구리 절반이 더워져요 눈썹도 빨개지네 詩作 노트: 37살의 마티스가 당시의 시대정신을 추종한다. 나도 그 나이에 좀 그랬던 것 같은데. 여체를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이 간질간질할 것이다. 옆구리는 반만 달아오른다. © 서 량 2023.05.31

|詩| 아라베스크

아라베스크 -- 마티스의 그림 “바다와 해변의 열린 창에 등을 대고 앉은 여자”에게 (1922) 양탄자 울긋불긋한 양탄자 베이지색 감도는 흰빛 하늘, 하늘 빛 돛단배 여럿이 메시지를 주고 받네 살짝 어두운 얼굴 여자 얼굴 호랑나비와 등을 구부린 자벌레의 발레 춤 詩作 노트: 여유롭고 풍요로운 바다에 등을 돌린 여자의 마음을 분석한다. 속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네. 바닷바람이 마음놓고 드나드는 창문이 활짝 열려있다. © 서 량 2023.05.28

|詩| 손가락이 없다

손가락이 없다 --- 마티스의 그림 “스카프를 두른 여자”에게 (1936) 왼쪽 팔은 가래떡 보들보들한 가래떡 빨간 줄 죽죽 간 얼룩말 무늬 스카프가 파도 친다 心悸亢進 심계항진 웃는 듯 웃지 않는 여자 옅은 청색 노랑색 배경이 미국식 창호지문이다 순 미국식 시작 노트: 마티스가 추구했던 것이 부드러움이었을까. 가래떡 같은 팔의 부드러움. 이 여자는 왼손 손가락이 대충 서너 개거나 아예 아주 없네. 그따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 표정이다. © 서 량 2023.5.27

|詩| 던져진 섬

던져진 섬 -- 마티스의 그림 ‘흰색, 붉은색 배경의 젊은 여자’에게 (1946) 녹색 활엽수 활엽 활엽 날아간다 여자가 누워있네 가만이 누워있네 펼쳐진 회색 날개 날개 가려진 다리 하얗게 웃고 있는 다리 손가락 하나 없는 지느러미 가슴 지느러미 어디인지 둥둥 떠 있는 섬 커다랗게 붉은 섬 시작 노트: 우리의 다리는 어디까지나 다리지만 우리의 팔은 날개다. 접히기도 하고 펼쳐지기도 하는 날개. 그래서 마티스가 그린 여자들은 손가락이 흐지부지하거나 있는둥 없는둥 하다. 이 여자는 손가락이 전혀 없어. 참참, 물고기도 날개가 있다. 재밌지? © 서 량 2023.05.26

|詩| 팔죽지

*팔죽지 --- 마티스의 그림 “팔꿈치로 쉬는 여자”에게 (1943) 상박근 上膊筋이 어깨뼈 팔꿈치뼈 인대 靭帶에서 불룩불룩 솟아난다 그걸 모르지 몰라도 좋아 여자 뜨거운 이마 위로 삼단 같은 구름 칠흑 같은 구름 구름 삼단 같은 불길이 몽실몽실 일어난다 *上膊의 순수 우리말 시작 노트: 일흔세살 마티스의 눈이 더더욱 밝아졌다는 느낌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을 내버려 두지 않고 대상에게 자기 감정을 사납게 덮어씌운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 서 량 2023.05.24

|詩| 클로즈업

클로즈업 --- 마티스의 그림 “몽상, 책 읽는 여자”에게 (1921) 주홍색 벽 앞 흰색 서랍장 검정색 줄이 쭉쭉 간 책 옆 꽃병이 호젓해요 검정색 부츠에 밀착, 밀착된 여자의 발 타원형 거울이 몇 십 배 확대하는 옆 머리 머리를 갸우뚱한 채 몽상에 빠지는 눈길, 뚜렷한 눈길입니다 시작 노트: 여자가 나오는 마티스의 그림에는 늘 스토리가 있다. 한 사람의 히스토리를 전혀 몰라도 좋은 반짝하는 스토리! 그런 순간을 언어의 붓으로 그림 그리듯 표현하는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다. © 서 량 2023.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