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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준비작업

준비작업 뚜렷한 명암완만한 zipline 경사몸 이콜 목숨이다zipper 잠금장치 두개골이 제일 중요해줄 하나에 덜커덕 영혼을 맡기다니도우미 웃옷 주홍색이 눈부시다 詩作 노트:사전에 ‘집라인’이라 나와있는 zipline. 집이라니?! 괄호 속에 ‘와이어를 타고 높은 곳에서 아래쪽으로 빠르게 하강하는 실외 스포츠’라는 구질구질한 설명이 들어있다.    © 서 량 2024.03.07

빈 병 / 김정기

빈 병 김정기 빈 병에 마개를 덮는다. 바람이 들어가 흔들리면 시간이 할퀴어 삭아지면 이 병에 들어있던 녹쓴 칼 한 자루 다시 벼려서 쓸 수 없을까봐 이 병에 넣었던 꿀물 엎질러 진지 오래되었고 쓰고 신 맛에 길들이지 못하고 토해내던 너무 맑아서 깨어질 듯 한 병 하나 품고 있네. 지독한 오한과 목마름도 여기 담겨있었지 저장되었던 그리움의 더께도 문질러 헹구었네. 비워 놓은 병에 드나들던 약속도 저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몸은 나를 떠나가고 있네. 조금씩, 시나브로. © 김정기 2012.10.11

몸 / 김종란

몸 김종란 100개중 99개쯤 통점을 찾아 찌른다 아프다 아 그래서 산 거야 산 것은 아프면 요동을 친다 장구처럼 탱탱하게 부어 올랐던 언니의 배도 격렬하게 쥐어짜며 산 것의 시위를 벌인 건가 죽음은 먼 산 그늘에서 묵묵히 소요하고있다 아프지 않으려 치료 받으며 아파한다 한계를 넘나들며 살아있어 아름다운 것과 그 헛됨과 고통을 받아 드리며 지친 몸을 일으켜 기름칠을 한다 신을 경외하며 신이 지으신 아파서 펄펄 살아있는 몸을 관리한다 아비와 어미가 걱정하고 염려했던 것처럼 몸을 측은히 여기며 살아있음에 연민을 품는다 눈물 어린 눈으로 소나기 지나간 들판을 우짖으며 날아가는 새를 사랑한다 © 김종란 2011.07.05

몸을 입듯이 / 김종란

몸을 입듯이 김종란 몸을 입듯이 봄은 입고 한 발 걸음 한 발걸음 다가오듯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한 소리 가슴에 스며들듯 봄은 짓는다 푸른 공중으로 휘인 꽃가지 마음은 가볍게 피어나고 몸은 벚나무 둥치같이 무겁고 마르고 검다 한끼 밥을 짓듯 봄은 스스로 지어서 가파른 이랑에 엎드려 안간힘으로 움켜쥐고 있는 두 손을 향해 내민다 몸은 무겁고 마르고 검으나 봄을 입고 봄을 짓는다 © 김종란 2010.03.24

입춘의 말 / 김정기

입춘의 말 김정기 땅속에서 벚꽃이 피어 속삭이고 있다. 진달래의 비릿한 냄새 스며들어 신부를 맞으려고 흙들은 잔치를 벌이고 있다. 작년에 떨어진 봉숭아 씨앗이 겨드랑이로 파고들어 연노랑 웃음을 감추고 있다. 몸 안에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수 천 년 가두어 둔 바람이 새 옷을 준비하고 덜 깬 잠에서 흐느끼고 있는 벌레가 나비의 발음으로 말을 걸어온다. 꿀벌의 몸짓으로 노래 부른다. 지하에 준비된 봄의 언어를 목청껏 뱉어보는 새벽 품에서 자란 새들이 날개를 달고 돌아 올 수 없는 시간을 물고 반드시 약속은 지키겠노라는 입춘의 말을 듣고 있다. © 김정기 2010.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