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빈 병 / 김정기

서 량 2023. 1. 7. 19:03

 

빈 병

 

                       김정기

 

빈 병에 마개를 덮는다.

바람이 들어가 흔들리면

시간이 할퀴어 삭아지면

 

이 병에 들어있던 녹쓴 칼 한 자루

다시 벼려서 쓸 수 없을까봐

이 병에 넣었던 꿀물 엎질러 진지 오래되었고

쓰고 신 맛에 길들이지 못하고 토해내던

너무 맑아서 깨어질 듯 한 병 하나

품고 있네.

 

지독한 오한과 목마름도 여기 담겨있었지

저장되었던 그리움의 더께도 문질러 헹구었네.

비워 놓은 병에 드나들던 약속도 저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몸은 나를 떠나가고 있네.

조금씩, 시나브로.

 

© 김정기 201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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