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병
김정기
빈 병에 마개를 덮는다.
바람이 들어가 흔들리면
시간이 할퀴어 삭아지면
이 병에 들어있던 녹쓴 칼 한 자루
다시 벼려서 쓸 수 없을까봐
이 병에 넣었던 꿀물 엎질러 진지 오래되었고
쓰고 신 맛에 길들이지 못하고 토해내던
너무 맑아서 깨어질 듯 한 병 하나
품고 있네.
지독한 오한과 목마름도 여기 담겨있었지
저장되었던 그리움의 더께도 문질러 헹구었네.
비워 놓은 병에 드나들던 약속도 저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몸은 나를 떠나가고 있네.
조금씩, 시나브로.
© 김정기 201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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