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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물고기 합창단

파도가 철버덕철버덕 옆구리를 때리는 동안 생선 가시가 입천장을 콕콕 찌르는 동안 내 연삽한 유년기 그림책에서 뛰쳐나온 새빨간 금붕어며 말로만 듣던 울긋불긋한 비단잉어며 전기 찌르르 오르는 거무죽죽한 뱀장어며 미끈한 민물 미꾸라지들이  지휘자 눈치를 잘 살피고 잔기침도 참아가며 긴장한 표정으로 첫 소절 첫 소리를 읍! 하며 한 박자 쉬고 곡을 시작하네요 순 재즈 식 불협화음이지 당신이 할 말이 많을 때 터지는 그런 불협화음이지 물론 바다에 금붕어들이 버글거렸다 말도 안돼 파도에 휩쓸리며 금붕어들이 바이올린 멜로디에 박자 맞춰 내 팔뚝이며 허벅지에 조근조근입질하고 있어 간지러워요 웃음이 나와아무리 참으려 해도 못 참겠어 물고기들이 노래할 때 꼬리지느러미를 같은 포지션으로 잡고 몸을 흔드네 훌륭해 아주 좋아요..

2025.01.26

|컬럼| 136. 새빨간 거짓말

지난 5월에 맨해튼 호텔 여종업원 강간 혐의로 전 IMF 수석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이 체포됐던 뉴스는 큰 충격이었다. 요사이 그 종업원의 행실이 대단히 수상했다는 사실과 그녀가 일을 치른 후 돈을 받지 못해서 그를 성추행으로 고소했다는 주장이 다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법정은 그녀가 진술한 많은 거짓말을 대서특필했다. '거짓말'은 '거죽(겉: 表皮)말'이 변한 단어라고 우리말 고어사전은 풀이한다. 속 생각을 감추고 거죽으로 하는 겉치레 말이 즉 거짓말인 것이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거짓말을 남긴다 하면 심한 소리일까. 그 호텔의 잡역부가 법원에서 한 거짓말은 위증(僞證)이라 한다. '거짓 위(僞)'는 '사람 인'변에 '할 위'로 이루어진 문자다. 이쯤 해서 우리가 하는 거짓말이란 '사람을 ..

|컬럼| 156. 뱀 이야기

제우스의 사자(使者)인 희랍 신화의 헤르메스(Hermes)는 평소에 늘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그 지팡이 꼭대기에는 비둘기의 날개가 양쪽으로 펼쳐져 있고 그 밑으로 뱀 두 마리가 꼬불꼬불 타고 오르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옛날 한국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할 때 칼라에 달고 다니던 배지가 바로 헤르메스의 지팡이에 새겨진 'Caduceus' 였다. 막대기와 날개와 뱀이 합쳐진 군의관 배지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헤르메스는 또 저승사자 역할도 했다. 그는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을 지도하는 친절하고 발 빠른 관광 가이드였다. 죽은 이들의 영혼을 인도하는 이를테면 일종의 정신과 의사로 군림한 것이다. 로마 신화에서 헤르메스에 해당하는 신은 머큐리(Mercury)였다. 머큐리는 체온계의 빨간 수은을 뜻하기도 한다...

|컬럼| 214. 사디즘과 나르시시즘

2014년 4월 한국의 한 병장이 일등병을 큰 이유 없이 때려죽였다는 어처구니 없는 뉴스를 읽고 사디즘(sadism, 가학증)에 대하여 생각했다. 프랑스의 미치광이 귀족, 사드 후작(Marquis de Sade: 1740~1814)은 '가학성 변태 성욕'을 실천에 옮긴 인류의 원조로 손꼽힌다. 74년 평생에 29년을 감옥에서 그리고 마지막 13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사드'의 이름에서 유래한 사디즘이라는 말은 원래 남에게 성적으로 고통을 주는 쾌감을 뜻했지만 근래에는 남을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병적인 즐거움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로 변했다. 사디즘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지만 정신과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으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매사에 ..

|컬럼| 295. 말없음에 대한 정신분석

의사와 환자의 의사소통에 대하여 생각한다. 혼란스러운 마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한 사람과 정신과의사라는 다른 한 사람 사이에 의사전달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대화를 나눌 때 환자건 의사건 서로 언급을 하는 사항보다 언급을 하지 않는 사항이 더 많다는 사실도 이상하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소통과 불통에 적용된다. 사실 우리는 말하기(有言)보다 말없기(無言) 쪽으로 더 관심을 쏟아야 할 때가 많다. 나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카테고리로 침묵의 의미를 분류한다. 1. 마음이 편해서 말이 없기흔쾌한 휴식이 진행되는 상황이다. 에너지의 재충전. 음악회 중반부에 삽입된 인터미션의 효능이랄 수도 있겠다. 감칠맛 나는 섹스를 끝낸 원기 왕성한 남녀가 서로에게서 잠시 떨어져 제각각 말없..

|컬럼| 484. 도망자

1960년대 중반경 미국과 한국을 휩쓸었던 미드 를 기억하는가.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채 제라드 경위에게 쫓겨 다니면서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하여 ‘외팔잡이 사내’를 잡을 때까지 미 전역을 방황하던 소아과의사 리처드 킴블의 어두운 얼굴을. ‘도망자’는 도망할 逃, 망할 亡, 놈 者, 나쁜 뜻이다. 어릴 적에 한자어 ‘亡’자를 무서워한 적이 있다. 사실은 지금도 좀 그렇다. 니은자에 뚜껑을 위태롭게 얹어놓은 것 같기도, 상투가 달린 디귿자처럼 보이는 망할 亡.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과 행동이 정상을 벗어난 치매 상태를 뜻하는 망령(妄靈). 기억력이 완전 망가진 망각(忘却), 사방팔방 검푸른 파도만 출렁이는 망망대해(茫茫大海). 망중한(忙中閑). 정치적 이유로 본국을 떠나는 망명(亡命). ‘망’이..

|컬럼| 483. 감각 프로토콜

오감(五感)을 생각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태아의 발달과정을 살펴본다. 임신 2개월에 눈의 망막이 생기며 3개월에 내이(內耳)가 자리를 잡고 혀에 맛봉오리가 솟아나는 태아. 당신과 나는 4개월의 태아였을 때 엄마 자궁 속에서 빛에 반응을 보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빨기도 했다. 6개월때쯤 엄마 목소리와 다른 소리를 인지하고 7개월에 단맛 쓴맛을 분별했고 8개월에는 소리의 강약과 고저와 엄마 냄새 또한 알아냈던 것이다.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 태아 발달과정의 흑백 그림을 상기한다.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에 등이 휘어진 생선 같은 생명체가 벌써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무언가를 피부로 느끼다니.  태아의 입과 혀는 말을 하는 대신에 자기 손가락을 빨고있다. 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