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량 594

|컬럼| 124. 받아라!

받아라! 우리말이 자꾸 영어로 대치되고 있다. 영어가 섞이지 않으면 행여 의사소통을 못할세라 우리는 말끝마다 영어를 남발하고 있다. 일례로, 요새는 누구도 '시장개발을 위한 개념'이라 하지 않고 '마케팅 컨셉'이라 한다. 우리는 왜 '개념'이라는 좋은 우리말을 제쳐놓고 '컨셉'이라는 영어를 어색하게 발음하는가. 'concept'는 라틴어 'concipere'의 '받아들이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우리말로 '개념'이라 하고 옥편은 '대개 개'와 '생각 념'으로 풀이한다. 개념은 ‘대충 하는 생각’이랄 수 있다. 그것은 여러 관념 중에서 공통된 요소를 종합 분석한 유추의 결과이며 수학공식에서처럼 철저한 정확성을 초월한 여유만만한 인간의 인식체계다. 우리의 인식작용은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인..

|컬럼| 123. 이름에 대하여

이름에 대하여 자고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거늘, 그 풍조를 좇아 우리는 명문대학을 추구하고 명품을 밝히는 관습이 있다. 하다 못해 얼마 전에 무심코 본 티브이 광고에서도 '김치도 명품이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김춘수는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며 의미심장하게 술회한다. 이 발언은 꽃도 관등성명이 분명해야 꽃답다는 엄청난 성명서처럼 들린다. 반면에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1597) 2막 2장에서 줄리엣의 입을 빌려 이렇게 설파한다.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詩| 허드슨강 무지개

허드슨강 무지개 누군가 언젠가 말하지 않았던가미안한 마음 없이 생각도 없이Green turtle 등 푸른 거북이Hammerhead shark 망치머리 상어 마음놓고 하늘을 헤집는 당신이며다 화려한 환상이라고 까만 배에 노란 줄이 죽죽 간 열대어처럼 詩作 노트:허드슨강 바닥 깊숙이 환상 속 당신이 숨어있다. 비 개인 후 솟아나는 무지개를 보면 알 수 있다. © 서 량 2015.06.16

2025.06.17

|컬럼| 121. 김치의 역사를 찾아서

김치의 역사를 찾아서 “My salad days, when I was green in judgment: cold in blood,” – “내 풋내기 시절, 판단이 미숙하고 피가 차가웠던 시절,” -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앤서니와 클레오파트라」(1606)에 나오는 클레오파트라의 대사다. 'salad days'라는 표현은 아직도 현대영어에서 그대로 쓰이고 있다. '샐러드 시절'은 '푸성귀 시절'로 직역할 수 있다. 푸성귀는 왠지 싱싱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신선한 채소는 식물왕국의 영계에 해당된다. 일찍이 의술의 태두 히포크라테스(BC460~BC370)는 야채가 소화기를 쉽게 통과하는 특성이 있으므로 주식(主食) 전에 먹으면 음식의 침체현상을 막는다고 설파했다. 스테이크를 먹을 때 우선 샐러드를 많이..

|컬럼| 120. 사랑의 약속과 도발의 심리학

사랑의 약속과 도발의 심리학 "... and as he moved, a small provocative smile curved her lips. "Going my way, soldier?" she murmured." - "그리고 그가 움직이자 약간 도발적인 미소가 그녀의 입술을 맴돌았다. "병사님, 제가 가는 길로 가시겠어요?" 하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 글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영어 교과서에 나왔던 'Appointment with Love, 사랑의 약속'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엊그제 추수감사절에 친지 몇 명을 초대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밑도 끝도 없이 그 문장이 기억에 떠올랐다. 이것은 북한의 김정일이 11월 23일에 연평도에 포탄을 퍼부은 짓을 '도발' 행위라고 명명한 한국 언론에 대..

|컬럼| 119. 삼천포로 빠지다

삼천포로 빠지다 1773년 12월 16일에 보스턴의 급진주의자들이 영국의 세금정책에 반대하기 위하여 보스턴에 입항한 영국상선에 탑승하여 차(茶)를 뭉터기로 바다에 던지는 난동을 부렸다. 그 사건을 이름하여 'Boston tea party'라 했는데 근래에는 'Boston'을 빼고 그냥 'tea party'라 한다. 최근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민주당을 형편없이 압도한 것도 급진적 보수세력인 'tea party group'의 공헌이 컸다는 보도다. 'tea party'는 보스턴에 관련된 미국 역사를 모르면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다. 우리말에 누가 어디를 간 후 다시 나타나지 않은 경우에 '함흥차사'라 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이 쿠데타를 두 번이나 일으켜 이복 형제들이며 피 비린..

|詩| 조지 워싱턴 브리지

조지 워싱턴 브리지 철제의 기둥이 쓰러지며 당신을 덮듯동쪽을 지배하는 세찬 기력뉴저지를 스치는 낙동강 물결이여바람결 허드슨 강에 흩어지며 코 앞에 살아나는 샛노란 꽃잎 나리 나리 개나리 숨결이다 철제의 기둥이 신음하며 당신을 달래듯하늘을 감싸는 낙동강 그림자여내 아버지의 시퍼런 청춘이여 詩作 노트:2001년 첫 시집에 내놓은 이 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 수를 많이 줄이고 고쳤지만. 아무렴, 역시 나는 나다. © 서 량 2025.06.14

2025.06.15

|컬럼| 118. 소녀와 숙녀

소녀와 숙녀 바람 부는 가을날 맨해튼 중부쯤 어느 북적거리는 레스토랑 같은 데서 화장실을 가노라면 배설행위의 남녀 유별이라는 도시적 질서와 시책 때문에 자신의 성(性)을 명심하며 도어를 확인해야 한다. 공자왈,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우리는 치마와 바지를 단정하게 입은 만화 같은 아이콘을 힐끗 체크하지만 굳이 'Ladies' 혹은 'Gentlemen'이라는 텍스트가 지성인들의 분별력을 도와준다. 숙녀나 신사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배설 장소를 선택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꼭 신사와 숙녀라야만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개념은 인류 인권위원회에 회부돼야 한다. 근래에 위선을 싫어하는 풍조에서 'Women'과 'Men'이라고 쓴 간판도 허다하지만. '숙녀'와 '신사..

|컬럼| 116. 폼생폼사

폼생폼사 초등학교 때였는지 가장 기초적인 기하학을 배우던 마당에서 삼각형, 사각형 같은 품위 있는 한자어에 마름모꼴, 사다리꼴처럼 순수한 우리말을 처음 배웠던 기억이 난다. '꼴'이라는 단어는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라는 학설도 있다. '꼴'은 한자어 골(骨)이 경음화 된 발음이라 하니 그것은 마치도 '골통'이 '꼴통'으로 변천한 언어의 변천사와 진배없다. 상대하기 싫은 놈을 향하여 '저 놈은 꼴도 보기 싫다'라고 뇌까리는 우리의 말 습관은 또 어떤가. 당신의 언어감각이 잠든 사이에 '닮은꼴'에서처럼 중립적으로 쓰이는 '꼴'의 뜻이 어찌 그리 부정적으로 변했는가. 궁금하던 차에 사전을 찾아봤더니 '꼴'의 뜻이 사물의 모양새나 됨됨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 혹은 어떤 형편이나 처지 따위를 낮잡아 이르는 ..

|컬럼| 115. 아홉이라는 숫자

아홉이라는 숫자 당신은 고양이가 아홉 번의 생(生)을 산다고 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전설 속의 허기진 고양이가 어떤 집에 살금살금 들어간다. 접시 위에 배 고파하는 아홉 명의 아이들을 위해 준비 된 아홉 마리의 생선이 놓여 있다. 얌통머리 없는 고양이는 그 아홉 마리의 생선을 냠냠 짭짭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 치운다. 다음날 불쌍한 아홉 명의 아이들은 배가 고파 죽고 고양이 또한 배가 터지게 먹은 포식의 결과로 죽는다. 이 사실을 안 신(神)은 노발대발해서 고양이로 하여금 하늘에서 땅까지 아흐레 동안 떨어져 죽게 만든다. 지금도 고양이는 그 아홉 마리의 생선이 뱃속에서 하나씩 죽어 가도록 아홉 번을 죽어야 비로소 종국에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는 끈질기고 저주스러운 삶을 산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