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량 468

|컬럼| 483. 감각 프로토콜

오감(五感)을 생각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태아의 발달과정을 살펴본다. 임신 2개월에 눈의 망막이 생기며 3개월에 내이(內耳)가 자리를 잡고 혀에 맛봉오리가 솟아나는 태아. 당신과 나는 4개월의 태아였을 때 엄마 자궁 속에서 빛에 반응을 보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빨기도 했다. 6개월때쯤 엄마 목소리와 다른 소리를 인지하고 7개월에 단맛 쓴맛을 분별했고 8개월에는 소리의 강약과 고저와 엄마 냄새 또한 알아냈던 것이다.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 태아 발달과정의 흑백 그림을 상기한다.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에 등이 휘어진 생선 같은 생명체가 벌써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무언가를 피부로 느끼다니.  태아의 입과 혀는 말을 하는 대신에 자기 손가락을 빨고있다. 젖..

|詩| 반백 년

반백 년 기압골의 영향이다보아라 저 미세한 물방울 생명체위로 치솟았다가 이내 아래로 귀순하는 우리의 中心옴짝달싹하지 않는 뚝심을폭포는 아랑곳없다 Time doesn’t care우리는 물벼락을 맞는다 아스라하게 詩作 노트:한 살도 안된 아들을 안고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찍은 사진을 수채화로 바꾼다. 폭포 소리를 유심히 듣는 아들!  ⓒ 서 량 2025.01.02

|컬럼| 482. 주삿바늘과 아메리칸 치즈

내가 전병원의 ‘lunch coverage’를 맡는 날, 점심시간 끝 무렵. ‘Code Green’, 위기상황을 알리는 확성기에서 명시하는 장소가 3층 식당이다. 어느 병동 환자가 무슨 일을 터뜨렸을까. 나이가 스물 안짝으로 뵈면서 좀 뚱뚱한 여자환자가 식당 앞 복도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다리를 뻗은 채 ‘L-shaped’, 니은(ㄴ)자로 앉아있다. 병동직원 서넛이 그녀를 둘러싸고 무언지 큰 목소리로 설득하고 있는 상황. 환자는 눈을 아래로 깐 채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기색. 무슨 일입니까? 글쎄, 식사를 끝내고 다들 병동으로 돌아갔는데 이 환자 혼자서만 벽에 기대앉아 한 마디 말도 없이 꼼짝달싹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얘는 평소에 남들과 의사소통을 곧잘 하는 편입니까? 암, 그렇고 말고요.  이름이 뭐..

|詩| 망가진 색소폰

망가진 색소폰 소리 나지 않는 baby grand piano 무념무상 무념 무념누워서 소리 내는 소프라노 색소폰어쩌나 어쩌다 일어난 불 불길등받이 방석 방석서껀 섞음도움토 혼동보조사How can I help? 하는 소프라노 색소폰 詩作 노트:2019년 1월 18일 집에 불이 났다. 소방당국에서는 전기누전이라 했다. 마침 또 Covid-19까지 겹쳤어.  ⓒ 서 량 2024.11.29

|컬럼| 481. 오해

뒷마당 풀밭에 사슴 한 마리 서 있다. 그에게 살금살금 접근해서 정면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슴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생후 몇 달 안되는 손녀딸을 팔에 안는다. 그녀는 아주 차분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살핀다. 이 아이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토끼와 호랑이가 동화에서 말을 주고 받는다. 동화작가는 의인화(擬人化) 기법으로 동물을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말은 생각을 전제로 하는 법. 당신의 손짓발짓, 웃거나 찌푸리는 얼굴, 짧은 탄성 같은 것들은 비언어(非言語)적인 도우미 역할을 할 뿐 세련된 ‘마스터 오브 세리머니’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아이가 어른처럼 언어를 사용해서 생각한다는 설정을 성인화(成人化)라 한다. 나는 사슴도 손녀딸도 언어를 훌륭하게 ..

|詩| 오해

오해 밤과 낮이 서로 자리를 바꾸며 태양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귀머거리야. 베어마운틴 들쑥날쑥한 산허리 외길을 급하게 운전한다. 나 또한 당신 무의식 속 깊이 파인 기쁨 밑바닥에 흐르는 슬픔을 도무지 실감하지 못한다. 같은 피가 많이 섞인 손주딸 마음도 마찬가지지.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싸락눈이 슬금슬금 내린 다음 날 아침 내 헛헛한 목덜미를 데워주던 겨울 햇살은 또 무슨 의미였는지. 詩作  노트:17년 전 쓴 詩를 약간 뜯어 고친다. 맞다. 詩는 고쳐 쓸 수 있다.내가 나를 고쳐 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 서 량 2007.08.20 – 2024.11.23

|詩| 모짜르트

모짜르트 나이도 어린 놈이클라리넷을 귀신같이 잘 부는 친구를 위하여작곡한 곡 양념 좋은 불고기 한참 맛깔스런수유리 장미원 언저리 햇살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형편없는 시를 쓰는가창현이 권택이 영수 규동이는 저토록누구를 위하여 현악기를 기똥차게 연주하는가 詩作 노트:신영수 엄규동이 나 한참 어린 나이 수유리숲에서 모짜르트 클라리넷 5중주를 겁도 없이 연주했다네  ⓒ 서 량 2024.11.20

|詩| 금싸라기

금싸라기 이빨웃음 초봄의 연두나도 그랬다! 하는 학림이 잘한다! 하는 병오 꼼꼼하기도 해라 사무총장 원동이 왕십리 내 아버지 들입다 좋아하는 홍철이의대 정문 샛노란 병아리들 세차게 날아가네 남이사 웃거나 말거나 새파랗게 젊은 놈들 詩作 노트:손에 졸업장들을 들고 있다 겨드랑에 끼기도 했네 한쪽 무릎을 꿇은 병오가 주는 거 없이 폼이 난다  ⓒ 서 량 2024.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