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詩| 어항 주인

서 량 2020. 9. 13. 20:18

 

꼬리가 길게 늘어진 금붕어를 멀리 떨어져서 보면 마치도 곱게 펼쳐놓은 조그만 장난감 부채를 보는 기분이 든다 이 조그만 장난감 부채는 맑은 물속에서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킨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금붕어를 키우기 위하여 고생을 해 왔고 마음 속 전쟁을 벌려 온 것이다 어항 주인이 다년간 경험한 바에 의하면 금붕어들 중에도 제일 생명력이 강한 금붕어는 노리끼리한 주홍색의 몸 빛깔에 흡사 시골 개천에서 흔히 잡을 수 있는 민물붕어의 축소판으로 보이는 금붕어다 생김새가 총알 처럼 보이는 이 강인한 족속은 6.25 때 청량리 역전 쯤에서 우리들 발길에 아무렇게나 채이던 어린애 손가락 정도 크기의 M1 총알과 허물어진 시멘트 벽 기총사격의 상처와 恨을 연상 시키는 데가 있다 전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모르는 이 금붕어들은 반듯하게 네모난 유리상자의 제한공간 속에서 언제나 기쁘게 뛰어 논다

 

어항 속 금붕어는 자꾸 죽는다 애초에 열 마리 정도 풍덩, 풍덩 구름이 우박 쏟듯 수중낙원으로 떨어뜨려서 으아앙 들리지 않는 애기의 울음으로 놈들을 탄생시킬 때 어항 주인의 마음은 삼천옥경의 열반이다 그러나 금붕어는 자꾸 죽는 법이다 나중까지 끈질기게 버티어 내는 놈들은 한 두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또한 편안한 자연사를 누릴 수 있을까

 

어항 주인이 신의 뜻을 품은 하나의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서 금붕어의 존속문제를 지켜 보는 생업에 종사 하는 동안 만큼은 모든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 부채와 기총사격의 상처들이 믿을 수 없으리 만치 신기하고 아깝고 쓰라리다 어항 주인은 금붕어들이 죽으면 장례식을 치루고 난 후에 전시에 군대에서 인원을 보충하듯 매우 예쁘고 실해 보이는 새로운 금붕어들을 다시 사다가 어항에 넣는다 그리고 세월이 총알처럼 지나간다 이 놈들은 아예 뱃속에서부터 튼튼하게 태어난 것들이기를 수세식 변기의 소용돌이치는 블랙홀의 처절한 침잠 속에 금시 매몰된 새끼두꺼비 같은 금붕어여 부디 영면하라 어항 주인은 無常日常의 변변치 못한 마음으로 일단 돌아서서 코를 푼 다음에 방금 새로이 천상탈락 하강의 속절없는 응보인 듯 깊디 깊은 어항 속으로 떨어뜨린 두 마리의 금붕어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 줄까 하고 잠시 생각해본다

 

© 서 량 2000.11. 15-- 첫 번째 시집 <맨하탄 유랑극단>(문학사상사, 200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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