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스를 위한 詩 106

|詩| 클로즈업

클로즈업 --- 마티스의 그림 “몽상, 책 읽는 여자”에게 (1921) 주홍색 벽 앞 흰색 서랍장 검정색 줄이 쭉쭉 간 책 옆 꽃병이 호젓해요 검정색 부츠에 밀착, 밀착된 여자의 발 타원형 거울이 몇 십 배 확대하는 옆 머리 머리를 갸우뚱한 채 몽상에 빠지는 눈길, 뚜렷한 눈길입니다 시작 노트: 여자가 나오는 마티스의 그림에는 늘 스토리가 있다. 한 사람의 히스토리를 전혀 몰라도 좋은 반짝하는 스토리! 그런 순간을 언어의 붓으로 그림 그리듯 표현하는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다. © 서 량 2023.05.23

|詩| 아네모네 아코디언

아네모네, 아코디언 --- 마티스 그림, “아네모네와 함께한 여자”에게 (1937) 무릎 위로 펼쳐진 책 accordion 흰 건반 사이로 붕가붕가 울리는 검은 건반 소리 진분홍색 꽃덩어리 여자 왼쪽 이마에 안착하는 anemone 크게 뜬 왼쪽 눈 오른쪽은 반개반폐 半開半閉 빨강 줄무늬 세상이 붕가붕가 열리네 시작노트: 마티스의 그림을 눈을 반쯤 감은 채 음미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 그림 속 여자는 아네모네가 왼쪽 이마를 덮은 상태에서 오른쪽 눈을 반 정도 감고 있다. 세상이 반개반폐 상태일 것이다. © 서 량 2023.05.21

|詩| 대각선

대각선 -- 마티스의 그림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1926) 저 삐딱한 자세를 보세요 촘촘한 격자무늬 쑥색 암체어에 숨겨진 함정 검푸른 구름으로 무릎을 가린 여자 벽돌색 바닥에 오른쪽 발바닥을 대고 *아포칼립스를 기다리는 갸름한 얼굴을 *Apocalypse: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세상의 종말 시작 노트: 마티스가 화폭에 담은 여자들 중에 무심한 표정의 여자들이 많다. 나는 여성이라는 정치적인 표현보다 여자라는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 그림 속 여자는 세상의 종말이 와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얼굴이다. © 서 량 2023.05.19

|詩| 푸른 수첩

푸른 수첩 -- 앙리 마티스 그림, “책 읽는 여자”에게 20C 꽃병에서 눈을 떼는 순간 꽃병이 사라진다 재밌지 꽃병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거 빨간 꽃의 만개 턱을 괴는 당신의 두툼한 하박근 글자가 없는 책 하얀 책 광채 금방 밑으로 떨어질 듯 없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 푸른 색 커버 삼성 휴대폰도 시작 노트: 꽃이 있다 없다 하는 명제에 시달린다. 그림 속 여자의 실체마저 의심한다. 있고 없음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마음가짐이 재미있어진다. 마티스의 책 읽는 여자가 시대를 뛰어넘는다. © 서 량 2023.05.15

|詩| 야자수의 원근법

야자수의 원근법 -- 마티스 그림, "창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여자"에게 (1921) 꽃빛 강물이 흐른다 꽃은 붉은 색 강물이 부르는 노래 무박자 無拍子 여자가 손에 잡은 활 바이올린 활 반으로 쩍 갈라지는 coconut 코코넛 열매 쪽빛 하늘이 일으키는 세포분열 뚜렷한 창문 윤곽이 샛노란 창문 밖에서 야자수 사이로 붕 뜨는 저 돛단배를 봐봐 시작 노트: 그림에서 소리가 난다. 악기를 보는 순간 다짜고짜 악기에서 소리가 나기도 한다. 대개는 박자가 없는 소리. 마티스의 이 그림에서 노골적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다. 야자수 나무를 배경으로 귀가 멍멍해지도록 크게 울리는 fortissimo, 포르티시모, 매우 세게. © 서 량 2023.05.11

|詩| 검은 눈동자

검은 눈동자 --- 앙리 마티스의 그림, “바이올린과 함께한 여자”에게 (1923) 숭늉색 책상 바이올린 활이 나를 채찍질하네 심한 손가락 연습 손가락 연습의 휴식 점점 커지는 여자의 눈동자 숭늉색 발목 동공확대 동공확대 그림이 벽 위에 쌓이네 바이올린 몸체가 사라지고 우주가 전 우주가 고요해지는 오후에 시작 노트: 한 여인이 바이올린을 배와 무릎 사이에 옆으로 세워 얹어 놓고 바이올린 활을 손에 쥐고 있다. 음악 연습을 시작하려다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지, 도중에 쉬는 중인지, 연습을 다 마쳤는지. 검은 눈동자에 동공확대가 일어난다. 마티스 그림 속 여자는 늘 모호한 분위기를 풍긴다. © 서 량 2023.0ㅈ5.05

|詩| 책과 파라솔

책과 파라솔 -- 앙리 마티스의 그림, ‘파라솔과 함께 책 읽는 여자’에게 (1921) 풀섶에 뒹구는 하늘색, 옥색 차양 넓은 내 모자를 보세요 국방색, 군청색 파라솔이 자외선을 막아요 당신 얼굴이 풍기는 복숭아 냄새 T셔스 앞 V자로 펼쳐지는 공간에서 책갈피, 책갈피 사이로 목걸이가 흔들린다 시작 노트: 으레 파라솔을 펴고 그 아래에서 책을 읽을 줄로 알았지, 이 여자가. 아마 흐린 날씨였겠지. 그래서 파라솔은 펼쳐지지 않았다. 책 읽는 여자를 훔쳐본다. 무슨 책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굵은 목걸이만 눈에 띌 뿐. © 서 량 2023.04.23

|詩| 허벅지

허벅지 -- 앙리 마티스의 그림, ‘꽃과 함께 앉은 여자’에게 (1942) 꽃가지 빼곡한 꽃병 하나에 의자 다리가 넷이네 S자 모양 팔걸이에 얹히는 꽃 마음, 꽃 마음 손가락이 없는 오른손, 연한 손길이 홍시 빛 도는 주홍 색이네 대퇴근 대단한 언저리에 널브러지는 흰색 노랑색 어느새 봄 기운, 봄 기운 시작 노트: 마티스의 색채감에 홀린다. 무르익은 홍시를 연상키는 여인의 허벅지 색 선택이 대담하다. 봄이 그런 경지에 몰입하려고 벼르고 벼르는 4월 하순에. © 서 량 2023.04.22

|詩| 등뼈

등뼈 -- 앙리 마티스의 그림, ‘벌거벗은 여인’에게 (1949)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인다 굵은 선 봄바람 여름바람, 더더욱 부드러운 맨살 맨가죽으로 단단히 가려 놓은 기본원칙 자세를 굽히면 좀 돌출하는구나 앞뒤 가릴 것 없이 오른쪽 왼쪽이 뒤범벅이 되는 중 우리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고개를 돌리는 중에 시작 노트: 마티스는 평생을 노출과 은닉을 능수능란하게 구가했다. 나이 많이 들어서 그는 색채보다 선, 線을 선호했던 게 아닌가 하는데. 아예 선으로 색채를 가려버리는 시도였을까. 하여튼 나는 가끔 그의 굵은 선이 좀 무서워질 때가 있다. © 서 량 2023.04.15

|詩| 오른쪽 팔

오른쪽 팔 --- 앙리 마티스의 그림 “앉아있는 여자”에게 (1936) 옅은 선 짙은 선 둘 다 무슨 내막이 있다 굵거나 가늘거나 귀를 덮은 옆 머리가 눈빛과 매치되는 중 상박근, 上膊筋의 근력을 오른쪽이 도맡는다 투명하게 일그러지는 당신의 눈 코 입! 시작 노트: 가늘게 속삭이거나 분명한 어조, 語調거나 못 들은 척하는 눈빛으로 속 마음을 전한다. 앙리 마티스의 그림에 나오는 여자들이 늘상 그렇다. 이 여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중이다. 오른쪽 팔에 숨겨진 근력, 筋力을 느끼면서. © 서 량 2023.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