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의 詩모음 158

오래된 유화 / 김종란

오래된 유화 김종란 가을 강을 바라 본다 오래된 유화의 하늘 밑 드나드는 미래의 사람 길어진 머리로 물고기 떼 한데 어울려 헤엄치며 도서관 문을 드나든다 쉬임 없어 느린 강 끝없이 춤추는 구름을 안으며 하늘은 깊고 푸르다 가을에 방치되어 있다 바랜 하늘색 신발을 신고 강을 등지고 걷는다 아늑하고 한적한 곳 가을 숲 옆구리에 몸을 부린다 숲은 어디나 있다 맨하탄 부동의 마천루 모방한다 하루를 미친 듯 걸어 푸르게 무거워질 때 돌아 온다 가을 풀 벌레 소리 귀에 환하다 누군가의 그림에 들어가 보는 도둑 같은 밤 빈 캔버스안에 얼굴을 무거운 이야기를 버리고 온다 가을 풀벌레 소리 © 김종란 2014.10.15

자줏빛 정원 / 김종란

자줏빛 정원 김종란 포도주 잔 밑 바닥에 남겨진 자줏빛 얼룩 정원이 어두워지는 무렵입니다 눈을 감으며 바라 보는 바람 소리입니다 소리 날아 오르는 깃털에 깃든 찰나를 잡았었지요 순간 찬란한 빛 흐려지며 매혹/ 어둠의 깃을 치고 날아 갔으니 바다 하늘 손 잡은 바다 흐려지는 부분 어느 곳 서성이지 않을까 밤이 찾아 드는 정원 Cassiopeia 자리를 지나 밤 하늘을 날아 다닙니다 그 찰나를 볼수 있을까 은폐된 검은 눈/ 그 분의 품에 들었을까 자줏빛 정원에서 귀 기울이는 시계 소리 바람 소리입니다 © 김종란 2014.09.02

봄, 비행일지 / 김종란

봄, 비행일지 김종란 비상 착륙한 오지에서 오렌지 몇 알 패랭이 꽃 몇 송이 물 한 컵 루소의 고백록 빈터에 적어 본다 울렁이고 헛헛하다 (이 어지러움을 잠 재울 한마디 말을 기다린다) 눈을 감고 옷깃을 여민다 찻잔에 소용돌이 치던 바람 낯선 바람소리에 입술을 댄다 바람의 기억으로 비행의 속도를 더듬는다 몰두하던 풍경이 조각조각 흘러내려 유리 파편에 스며든다 반짝임을 손끝으로 민다 그 작은 유리문 뒤 배회하던 먼 길 베고 누웠던 길 고양이 한 마리 화들짝 감았던 눈을 뜬다 허기지고 눈부시다 봄은 가벼이 날아가 남겨진 것은 무거워 허기지고 눈부시다 먼 길을 다시 걸어 가야 한다 (한 마디 말을 붙잡는다) © 김종란 2014.04.03

수묵화 3 / 김종란

수묵화 3 김종란 서늘한 이국(異國)의 말로 레슬링을 해 숲에서는 문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근육과 핏줄이 엉기어 있지만 숲에서는 살아 있으리라 눈 폭풍 속을 달려 겨울 숲 눈을 가리고 달리고 있어 언제 누가 내가 네가 이국의 말로 레슬링을 하고 있어 있는 말 없는 말/ 눈보라 말하면서 도망가고 있어 겨울숲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어 먼 겨울숲은 눈보라에 잠겨 있어 © 김종란 2014.01.08

바다 도서관 / 김종란

바다 도서관 김종란 잡은 것은 갈매기 깃이다 깃과 가슴의 흰빛 들여다보다 깜빡 종아리까지 파란 물이다 바닷물에 잠길 듯 떠있는 의자에 앉아 페이지 후르륵 넘긴다 빌딩 그늘 지나는 겨울 전차 소리 넘긴다 끝 여름 하얗게 불붙는 미루나무 울음 소리/ 깃을 들여다본다 눈 지르감다 깃을 덮는다 파란 물에 넘실대며 떠있는 의자 도서관 문은 임의로 잠기며 흰 갈매기들만 파도를 스치며 날아오른다 © 김종란 2013.10.07

따뜻한 별 / 김종란

따뜻한 별 김종란 얼음장 하늘에 별들이 웃고있다 바람이 불고 겨울이 온다 곧 눈이 내릴 것이다 나를 울게 하는 사람의 목소리 별빛 아래 사람은 둥지를 틀고 길 위에 서면 별을 바라 본다 바람이 사납게 불어 하늘이 더욱 맑아지는 밤 휘모는 바람이 그리는 늦가을 밤 한참 동안이나 울지 못했었다 나뭇잎이 지기 전에 많이 울어야겠다 내가 울면 별 하나 내려올까 눈물 흘린 시간에 누군가 그 언 발을 녹일까 © 김종란 2013.10.28

담장, 여백을 두른다 / 김종란

담장, 여백을 두른다 김종란 무너진 곳 있으면 그곳에 걸터앉는다 저 멀리 눈 가는 곳 너무 흐린 회색은 지운다 물기 머금은 나무 한 그루의 평화를 둔다 허수룩한 곳에는 어김없이 푸르게 영롱한 풀 나무인양 의젓하다 담장을 두르고 내 안의 생각이 고루 호젓한 안마당 물기 부르는 퇴색된 마루엔 달리아 꽃 화분이 놓여있다 담장이 낮아서 돌개바람도 슬쩍 들었다 나가고 햇빛은 신을 벗고 낮잠 한바탕이다 기름 냄새 나는 눈빛 씻으며 소리없이 다가오는 것들 본다 가볍게 다가와 무겁게 목을 조인다 그 거친 바람 달래 담 밖에 둔다 여기 즈음에 있다는 것 시간이 서로 다른 돌들이 맞대어 오래된 이 시간을 동그마니 안으며 당신의 빛을 우려내는 곳 어느 여백에 푸름으로 담장을 두른다 © 김종란 2013.11.04

가을 문(門) / 김종란

가을 문(門) 김종란 문은 열리며 닫힌다 아귀가 맞지 않는 문 건조한 열기에 뒤틀리어 덜거덕거린다 문 턱에 걸려 넘어진다 숲을 이루던 푸르른 미소 낮은 곳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다 숨겼던 눈물 떨어지는 곳 구부리고 신발 끈을 다시 맨다 노란 잎 뒹굴듯 뒹굴듯이 일어서다 순간 빛나며 쌓여 있다 호흡하며 일어선다 적막(寂寞)에 귀 기울인다 신라 시대에도 네가 그랬듯이 강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불어 가면 문이 열릴 것이라고 몸을 가볍게 말려 노랗게 흩어지며 목이 긴 새와 함께 나른다 © 김종란 2013.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