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13

공기 번데기 / 김정기

공기 번데기 김정기 긴 바지 걷어 올리고 물 위를 걸으리. 조약돌 밟고 나면 숲이 다가와 얼비친 세상 놓아두고 궂은 굴곡 건너 어제 감은 머릿결 쓰다듬으며 지금껏 열려 본일 없는 서랍에서 끄집어내는 웃음을 지어 보리. 그의 공기 속에 들어가 살라고 하면. 쨍하게 열어젖힌 창 커튼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명주실 타래 되어 온몸을 감겨오면 그의 창공을 향해 한 마리 누에로 껍질을 벗으리. 공기 번데기로 풋풋한 청춘의 문을 다시 두드리는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내 눈에만 보이는 그의 나라 엿보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 뛰는 것은. 그가 말하는 두 개의 달을 동시에 바라보며 정말 떠나는 것이 절정이란 말인가 누구도 흉내 못 낼 공백에서 만드는 고요로 아 아 하루키*의 공기 속에 들어가 살라고 하면. *일본작..

빨간 사과 / 김종란

빨간 사과 -- 시리도록 아름다운 세상을 남기고 가신 소설가 김지원님께 김종란 녹음 우거진 공원으로 검고 긴 머리 휘 날리며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녀의 눈은 풍성한 머리 바로 밑에서 꿈꾸고 문자는 두 손에 가슴에 춤추는데 스무 살의 그녀는 갔다 시린 손으로 따뜻한 가슴을 안으며 바람 부는 곳으로 있지 않은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남겨 놓았다 그녀는 언제나 스무 살이다 백 년의 베개머리에서 미리 온 가을 햇살처럼 환하다 백발이 무성 하여도 그 가을 햇살에 찍힌 세상은 한 입 베어 무는 빨간 사과 시어서 눈물 맺히며 웃음 환하다 © 김종란 2013.02.05

홍보석 / 김정기

홍보석 김정기 새어 들어온 햇살에 몸을 덥히며 알속에서 알을 낳아 깨뜨리면서 갇혀 있습니다 반짝이지 않으면서 찬란한 울림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등불이 되는 적막이 찬란합니다 이 공간에서 빚는 시간의 축제에 당신의 늪 속에 솟는 물로 비로소 목욕을 시작하면 늘어진 세포도 다시 줄을 당 깁니다 목에 걸린 가시도 삭아 내리게 하는 순연한 몸부림이 향내로 출렁입니다 그대의 숨소리가 있는 가는 8월이 견딜 수 없는 정현종의 시처럼 황금 물고기의 비밀을 알려 줍니다 여름 갈피에 빛나는 햇볕입니다 홍보석의 황홀한 경험입니다 © 김정기 2010.06.19

무주 구천동 / 김정기

무주 구천동 김정기 산 위에서 보면 아홉 동네 내려가면 여덟 동네인 산골짜기에 서 있다 아무리 찾아도 마을 하나는 없고 어진 세월만 흘러 물의 뼈들이 바위를 때리며 굴러 떨어져도 산은 말을 못한다. 산 까치들이 대추나무에 앉아 햇살을 쪼아대고 오래오래 들었다 놓은 팔을 벌려 다시 나를 엿보던 산의 정수리를 껴안는다. 드센 바람에 날아가 버린 마을에서 달의 힘줄이 뻗쳐와 곤한 잠 흔들어 깨어나 보니 평야에서 꾸는 꿈이었구나. 한세상 모였다 흩어지는 산이었구나. 굽이굽이 구천 번 돌아가는 산마루에 돌아보며 떠나는 사람이었구나. © 김정기 2010.03.14

달걀 깨기2 / 김정기

달걀 깨기2 김정기 토요일 아침 달걀을 깬다. 둘이 부딪치면 하나만 금이 간다. 둘의 싸움에서 한쪽만 부서지는 세상 사람들 같다. 먼 바다로 돌아가는 물살은 급해서 햇살을 앗아가는데 결국 하나 남은 성한 달걀은 이긴 것 같았지만 싱크대 모서리에 소리 내며 깨져서 피 흘리게 마련이다. 들창 너머 후미진 곳에 어두움을 만들던 여름도 서서이며 늪지를 감돌고 토요일마다 달걀을 깨는 손 끝에 맺히는 울음 © 김정기 2009.08.25

|詩| 떡갈나무의 오후 4시

누가 하루의 극치가 정오에 있다고 했나요, 누가 오후 네 시쯤 개구리 헤엄치 듯 춤추는 햇살의 체취를 얼핏 비켜가야 한다 했나요 봄바람은 이제 매끈한 꼬리를 감추고 없고, 초여름 뭉게구름이 함박꽃 웃음으로 지상의 당신을 내려다 볼 때쯤 누가 작열하는 오후의 태양을 품에서 밀어내고 싶다 했나요 반짝이는 떡갈나무 잎새들 건너 쪽 저토록 명암이 뚜렷한 쪽빛 하늘 속으로 절대로 철버덕 몸을 던지지 않겠다고 누가 말했나요 © 서 량 2009.05.29

발표된 詩 2020.07.26

|詩| 달팽이 몇 마리

시간이 당신을 아무리 재빠르게 지나친다 해도 이제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겠다 봄비가 내리고 있어요 병동 아득한 복도 끝에서 누군가 소리칩니다 몇 알의 신경안정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 줌 햇살이 내 살갗에 와 닿아요 요즘은 하고 싶은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간간 남 생각을 하지 않는 우리의 나쁜 버릇을 어쩌나 싶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며 얼굴을 치켜드는 당신이 참 좋아요 나는 기꺼이 허무를 감싸 안는다 습기 그득한 시간, 시간의 갓길을 천천히 기어가는 연체동물 몇몇을 실눈을 뜨고 보고 있어요 이제는 어엿한 봄이 아닙니까 밖이 © 서 량 2019.03.25

2019.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