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량 488

|詩| 던져진 섬

던져진 섬 -- 마티스의 그림 ‘흰색, 붉은색 배경의 젊은 여자’에게 (1946) 녹색 활엽수 활엽 활엽 날아간다 여자가 누워있네 가만이 누워있네 펼쳐진 회색 날개 날개 가려진 다리 하얗게 웃고 있는 다리 손가락 하나 없는 지느러미 가슴 지느러미 어디인지 둥둥 떠 있는 섬 커다랗게 붉은 섬 시작 노트: 우리의 다리는 어디까지나 다리지만 우리의 팔은 날개다. 접히기도 하고 펼쳐지기도 하는 날개. 그래서 마티스가 그린 여자들은 손가락이 흐지부지하거나 있는둥 없는둥 하다. 이 여자는 손가락이 전혀 없어. 참참, 물고기도 날개가 있다. 재밌지? © 서 량 2023.05.26

|詩| 팔죽지

*팔죽지 --- 마티스의 그림 “팔꿈치로 쉬는 여자”에게 (1943) 상박근 上膊筋이 어깨뼈 팔꿈치뼈 인대 靭帶에서 불룩불룩 솟아난다 그걸 모르지 몰라도 좋아 여자 뜨거운 이마 위로 삼단 같은 구름 칠흑 같은 구름 구름 삼단 같은 불길이 몽실몽실 일어난다 *上膊의 순수 우리말 시작 노트: 일흔세살 마티스의 눈이 더더욱 밝아졌다는 느낌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을 내버려 두지 않고 대상에게 자기 감정을 사납게 덮어씌운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 서 량 2023.05.24

|詩| 클로즈업

클로즈업 --- 마티스의 그림 “몽상, 책 읽는 여자”에게 (1921) 주홍색 벽 앞 흰색 서랍장 검정색 줄이 쭉쭉 간 책 옆 꽃병이 호젓해요 검정색 부츠에 밀착, 밀착된 여자의 발 타원형 거울이 몇 십 배 확대하는 옆 머리 머리를 갸우뚱한 채 몽상에 빠지는 눈길, 뚜렷한 눈길입니다 시작 노트: 여자가 나오는 마티스의 그림에는 늘 스토리가 있다. 한 사람의 히스토리를 전혀 몰라도 좋은 반짝하는 스토리! 그런 순간을 언어의 붓으로 그림 그리듯 표현하는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다. © 서 량 2023.05.23

|詩| 아네모네 아코디언

아네모네, 아코디언 --- 마티스 그림, “아네모네와 함께한 여자”에게 (1937) 무릎 위로 펼쳐진 책 accordion 흰 건반 사이로 붕가붕가 울리는 검은 건반 소리 진분홍색 꽃덩어리 여자 왼쪽 이마에 안착하는 anemone 크게 뜬 왼쪽 눈 오른쪽은 반개반폐 半開半閉 빨강 줄무늬 세상이 붕가붕가 열리네 시작노트: 마티스의 그림을 눈을 반쯤 감은 채 음미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 그림 속 여자는 아네모네가 왼쪽 이마를 덮은 상태에서 오른쪽 눈을 반 정도 감고 있다. 세상이 반개반폐 상태일 것이다. © 서 량 2023.05.21

|詩| 대각선

대각선 -- 마티스의 그림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1926) 저 삐딱한 자세를 보세요 촘촘한 격자무늬 쑥색 암체어에 숨겨진 함정 검푸른 구름으로 무릎을 가린 여자 벽돌색 바닥에 오른쪽 발바닥을 대고 *아포칼립스를 기다리는 갸름한 얼굴을 *Apocalypse: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세상의 종말 시작 노트: 마티스가 화폭에 담은 여자들 중에 무심한 표정의 여자들이 많다. 나는 여성이라는 정치적인 표현보다 여자라는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 그림 속 여자는 세상의 종말이 와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얼굴이다. © 서 량 2023.05.19

|詩| 푸른 수첩

푸른 수첩 -- 앙리 마티스 그림, “책 읽는 여자”에게 20C 꽃병에서 눈을 떼는 순간 꽃병이 사라진다 재밌지 꽃병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거 빨간 꽃의 만개 턱을 괴는 당신의 두툼한 하박근 글자가 없는 책 하얀 책 광채 금방 밑으로 떨어질 듯 없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 푸른 색 커버 삼성 휴대폰도 시작 노트: 꽃이 있다 없다 하는 명제에 시달린다. 그림 속 여자의 실체마저 의심한다. 있고 없음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마음가짐이 재미있어진다. 마티스의 책 읽는 여자가 시대를 뛰어넘는다. © 서 량 2023.05.15

|컬럼| 441. 미국식 교장 선생

옛날에 육군 군의관으로 임관하기 전 훈련병 시절 스트레스가 심했던 기억이 난다. 병동 입원환자들의 단체생활을 보면서 가끔 일어나는 연상작용이다. 단체의 스케줄에 따르는 삶은 자유행동의 여지가 별로 없다. 기상, 취침, 프로그램 참가, 식사 시간이 늘 일정하다. 아침마다 거행되는 ‘community meeting’도 그렇다. 고리타분한 번역으로 ‘반상회(班常會)’, 또는 그냥 ‘커뮤니티 미팅’이라 사전에 나와 있는 말을 나는 ‘조회(朝會)’라 부른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던 기억이 새롭다. 며칠 전 조회 시간에 ‘wheeling and dealing’을 화제로 삼았다. 노름꾼 사이에 유행했던 슬랭. 쉽게 말해서 ‘부정거래’라는 뜻. 정치가들 사이에 돈이 오가는 상황을..

|詩| 야자수의 원근법

야자수의 원근법 -- 마티스 그림, "창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여자"에게 (1921) 꽃빛 강물이 흐른다 꽃은 붉은 색 강물이 부르는 노래 무박자 無拍子 여자가 손에 잡은 활 바이올린 활 반으로 쩍 갈라지는 coconut 코코넛 열매 쪽빛 하늘이 일으키는 세포분열 뚜렷한 창문 윤곽이 샛노란 창문 밖에서 야자수 사이로 붕 뜨는 저 돛단배를 봐봐 시작 노트: 그림에서 소리가 난다. 악기를 보는 순간 다짜고짜 악기에서 소리가 나기도 한다. 대개는 박자가 없는 소리. 마티스의 이 그림에서 노골적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다. 야자수 나무를 배경으로 귀가 멍멍해지도록 크게 울리는 fortissimo, 포르티시모, 매우 세게. © 서 량 2023.05.11

|詩| 검은 눈동자

검은 눈동자 --- 앙리 마티스의 그림, “바이올린과 함께한 여자”에게 (1923) 숭늉색 책상 바이올린 활이 나를 채찍질하네 심한 손가락 연습 손가락 연습의 휴식 점점 커지는 여자의 눈동자 숭늉색 발목 동공확대 동공확대 그림이 벽 위에 쌓이네 바이올린 몸체가 사라지고 우주가 전 우주가 고요해지는 오후에 시작 노트: 한 여인이 바이올린을 배와 무릎 사이에 옆으로 세워 얹어 놓고 바이올린 활을 손에 쥐고 있다. 음악 연습을 시작하려다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지, 도중에 쉬는 중인지, 연습을 다 마쳤는지. 검은 눈동자에 동공확대가 일어난다. 마티스 그림 속 여자는 늘 모호한 분위기를 풍긴다. © 서 량 2023.0ㅈ5.05

|컬럼| 440. 귀신과 영혼 다스리기

나도 당신도 꿈을 꿀 때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물체를 보면서 환청과 환시 증세를 일으킨다. 헛것을 듣고 본다. 여덟 살 때 살던 집 뒷마당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어느 땅거미 지는 저녁 녘 그 밑을 지나가며 무심코 하늘을 쳐다봤더니 지붕보다 키가 큰 나무 꼭대기에서 커다란 괴물이 이빨을 들어내고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앞마당 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지금 곱씹어보며 내가 본 것이 ‘환각’이 아닌 ‘착각’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외부 자극 없이 일어나는 감각을 환각이라 하고, 외부 자극을 틀리게 해석하는 것을 착각이라 부른다. 그것은 환시(幻視)가 아니라 착시(錯視)였다. 병동 환자 윌슨의 증상이 환시인지 착시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아무리 두 증세를 분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