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컬럼| 95. 말, 말, 말

말, 말, 말 악기가 좋아서건 연주자의 기법이 좋아서건 듣기에 좋은 소리가 나올 때 당신은 ‘저 톤(tone)이 참 좋아요' 할 것이다. 그냥 '소리'가 좋다고 말을 해도 되기는 되겠지만 그런 말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 별로 감칠맛이 나는 말이 아니다. 이를테면 듣기에 기분 좋은 남자 목소리를 '바리톤(baritone)'이라 해야지 어찌 '바리소리'라고 하겠는가. '톤'에서 '튠(tune: 음의 높낮이)'이라는 말이 파생했고 피아노 조율하거나 오케스트라가 시작하기 전에 악기들끼리 음정을 서로 맞추는 것도 '튠닝(tuning)이라 한다. 'tone'은 14세기 중반에 라틴어와 희랍어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기다 (stretch)'는 뜻이었다. 우리 말에도 억양(抑揚)이라는 말이 있는데 언어의 상대적인 높낮이를..

|컬럼| 217. 내 말이!

내 말이!  말도 안 되는 오해 때문에 환자가 내게 쌍소리를 한다. 영어로 듣는 욕, 'four letter word'는 우리말 육두문자(肉頭文字)에서 오는 짜릿한 굴욕감이 별로 없다. 양키들의 욕은 스펠링이 네 개이므로 발음도 짧다. 허기사 우리말 욕도 짧기는 마찬가지다. 자고로 욕이란 화급하고 간결해야 제 맛이 나는 법! 그 분열증 환자에게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라며 타일러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의사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ah, and uh, even when you say the same word!' 하며 순 한국식 영어를 하는 환상에 빠진다. 말(言)의 어원을 찾으려고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을 쏘다녔지만 헛수..

하루 / 김종란

하루 김종란 반딧불 일렁이듯 오월 보리물결 뒤채듯이 한치의 공간에 슬며시 들어선 좀도둑 이무로이 미소 짓다, 기웃대다 어여쁜 것 훔쳐 내빼지 오늘 그리고 미래의 몸으로 세상을 지은 말(言) 품은 화살로 한치의 여지에 그대 안 부르르 떨며 명중하는 흙의 꿈 쓸모를 버릴 수 없어 과녁은 지는 석양을 나르는 화살의 꿈을 꾸네 하루 하루 낯익은 도둑을 배웅하며 들숨과 날숨 사이에 새겨보는 말 세상을 짓는 말 © 김종란 2010.12.14

|詩| 꽃에 관한 최근 소식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이 꽃을 면밀히 조사하는 동안 꽃 내장이 뭉그러지고 꽃 뼈가 으깨지고 꽃은 무색 무취의 기체가 된다 꽃은 항상 이름 없는 동작이다 당신이 한 송이의 꽃을 알려 할 때 당신이 한 송이의 꽃이 되려 할 때 꽃의 근엄한 칭호가 당신을 방해한다 우리는 묵묵한 꽃말 골갱이를 씹어 삼키고 너덜너덜한 말(言) 껍데기를 뱉어낸다 꽃말을 먹을 때마다 꽃이 되는 우리들 꽃보다 더 새빨간 몸짓으로 으스스 진저리를 치는 우리들 꽃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작이다 © 서 량 2004.03.04 2004년 5월호에 게재 『시문학』2004년 6월호에서 (페이지 177-182) 이달의 문제작: 중에서 -- 안수환 (시인) 의미의 해체. 시적 진실의 존재론적인 자기파괴. 시는 ‘의미’가 아닌 ‘사건’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발표된 詩 2022.03.11

움직이는 역(station) / 김종란

움직이는 역(station) 김종란 살아 움직이는 말(언어) 눈 깜짝 할 사이 밤이 온 마음 울타리 넘는 은하수다 언어의 역전이 당당하게 불확실하게 서있다 눈빛 턱수염 역장의 미소가 신비롭다 *달리의 구부러진 시계, 확연하게 시간 너머에 서있는 언어의 역 당신의 지금을 지켜 보는 언어의 눈 시간과 공간에서 말의 속도에서 멀어지는 기차, 다시 몸을 숨기는 역 그 찰나 사람의 말은 태어난다 부러진 가지에 새 순, 소리 간직한 깊은 눈빛 하나 *Salvador Dali –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 김종란 2021.12.02

|컬럼| 183. 고양이와 개와 쥐

It rained cats and dogs last night! 정말 그랬다. 요란하게 싸우는 고양이와 개처럼 지난 밤에 비가 억수로 내렸다. 승용차 여섯 대가 이리저리 부딪혀서 사고가 난 고가도로를 차들이 엉금엉금 기었다. 더러는 샛길을 이용하러 했지만 교통이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출근이 이렇게 늦어진다는 건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다. 곤경에 빠졌다는 뜻으로 'between the devil and the deep blue sea'가 있다. 사람이 '악마와 짙은 청색의 바다'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섬뜩한 표현이다. 이런 걸 한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 하지만 나는 귀에 얼른 쏙 들어오는 '빼도 박도 못한다'는 순수한 우리말이 더 좋다. 그리고 그럴 때는 그냥 '쥐 죽은 듯' 가만이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