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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김종란

하루 김종란 반딧불 일렁이듯 오월 보리물결 뒤채듯이 한치의 공간에 슬며시 들어선 좀도둑 이무로이 미소 짓다, 기웃대다 어여쁜 것 훔쳐 내빼지 오늘 그리고 미래의 몸으로 세상을 지은 말(言) 품은 화살로 한치의 여지에 그대 안 부르르 떨며 명중하는 흙의 꿈 쓸모를 버릴 수 없어 과녁은 지는 석양을 나르는 화살의 꿈을 꾸네 하루 하루 낯익은 도둑을 배웅하며 들숨과 날숨 사이에 새겨보는 말 세상을 짓는 말 © 김종란 2010.12.14

|詩| 꽃에 관한 최근 소식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이 꽃을 면밀히 조사하는 동안 꽃 내장이 뭉그러지고 꽃 뼈가 으깨지고 꽃은 무색 무취의 기체가 된다 꽃은 항상 이름 없는 동작이다 당신이 한 송이의 꽃을 알려 할 때 당신이 한 송이의 꽃이 되려 할 때 꽃의 근엄한 칭호가 당신을 방해한다 우리는 묵묵한 꽃말 골갱이를 씹어 삼키고 너덜너덜한 말(言) 껍데기를 뱉어낸다 꽃말을 먹을 때마다 꽃이 되는 우리들 꽃보다 더 새빨간 몸짓으로 으스스 진저리를 치는 우리들 꽃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작이다 © 서 량 2004.03.04 2004년 5월호에 게재 『시문학』2004년 6월호에서 (페이지 177-182) 이달의 문제작: 중에서 -- 안수환 (시인) 의미의 해체. 시적 진실의 존재론적인 자기파괴. 시는 ‘의미’가 아닌 ‘사건’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발표된 詩 2022.03.11

움직이는 역(station) / 김종란

움직이는 역(station) 김종란 살아 움직이는 말(언어) 눈 깜짝 할 사이 밤이 온 마음 울타리 넘는 은하수다 언어의 역전이 당당하게 불확실하게 서있다 눈빛 턱수염 역장의 미소가 신비롭다 *달리의 구부러진 시계, 확연하게 시간 너머에 서있는 언어의 역 당신의 지금을 지켜 보는 언어의 눈 시간과 공간에서 말의 속도에서 멀어지는 기차, 다시 몸을 숨기는 역 그 찰나 사람의 말은 태어난다 부러진 가지에 새 순, 소리 간직한 깊은 눈빛 하나 *Salvador Dali –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 김종란 2021.12.02

|컬럼| 183. 고양이와 개와 쥐

It rained cats and dogs last night! 정말 그랬다. 요란하게 싸우는 고양이와 개처럼 지난 밤에 비가 억수로 내렸다. 승용차 여섯 대가 이리저리 부딪혀서 사고가 난 고가도로를 차들이 엉금엉금 기었다. 더러는 샛길을 이용하러 했지만 교통이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출근이 이렇게 늦어진다는 건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다. 곤경에 빠졌다는 뜻으로 'between the devil and the deep blue sea'가 있다. 사람이 '악마와 짙은 청색의 바다'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섬뜩한 표현이다. 이런 걸 한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 하지만 나는 귀에 얼른 쏙 들어오는 '빼도 박도 못한다'는 순수한 우리말이 더 좋다. 그리고 그럴 때는 그냥 '쥐 죽은 듯' 가만이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言語)을 타고 평생을 간다 / 한혜영

말(言語)를 타고 평생을 간다 한혜영 인생을 부리는 것은 9할 9푼이 말(言語)이다 자다가도, 죽음 직전에도 말 잔 등 에 올라야 한다 죽겠다는 말은 그래서 함부로 할 게 아니다 말 때문에 다 저녁때 끄덕끄덕 사막으로 들기도 하고 감옥이나 찻집엘 가기도 한다 가벼운 농담이라도 함부로 하지 마라 밥이나 술 산다는 약속조차도, 사랑한다는 농담 한마디 잘못한 배우 날뛰는 악몽에 머리끄덩이 잡혀 밤새 혼나는 것도 봤다 불가능이라고는 없던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한 것은 말 달릴 때를 놓친 게 원인이다 말은 눈도 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제 몸에 입력된 정보대로 귓속을 향해 돌진할 뿐, 권력이나 비밀을 가진 자는 더 조심스럽게 말을 몰아야 한다 내 말(馬)이든 네 말(馬)이든 말굽에는 요란한 편자가 있으므로,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