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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 김정기

겨울나기 김정기 바람 소리 몸속으로 스며들어 찬물에 손을 씻고 밀봉된 연서를 뜯어보는 영하의 밤 우리는 흘러간 것들 때문에 밀려오는 것을 밀어 내며 불을 지핀다 얼지 않은 바다를 건너 참나무 장작 불꽃이 되어 타 오르는 그는 시인은 영웅을 닮아 운명과 대결하며 끝없이 싸우다가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고 그럴 때 빛나고 아름답다고 이처럼 매혹적이고 장엄한 것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며 朔風도 영어로 불어오는 땅 아!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내가 사는 웨스트체스터를 달구고 있다 덩달아 나도 뜨거워져서 껴입은 옷을 벗어 휘영청 떠 있는 달 위에 걸며 겨울을 난다. © 김정기 2011.01.18

달 항아리 / 김종란

달 항아리 김종란 끝을 살짝 잡은 것 같은데 벌써 저녁 무렵 가볍게 한 잔을 마셨는데 꽃나무는 옹이가 지고 빗물 눈물 무늬가 어룽진다 스치듯 소매 끝자락 잡은 것 같은데 발은 닳아서 이미 경계에 가 닿아 있다 마루 끝에 잠시 앉았다가 목례를 하고 떠나든지 흰 도자기 그릇에 마음을 담고 잘 익은 술처럼 바라보며 약간 흔들어 보기도 하며 쓴 약처럼 두 눈을 감고 꿀꺽 삼키기도 하며 취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대 내가 아님을 © 김종란 2010.05.07

|컬럼| 63. 정신병이 달(月)에서 온다더니

'He is a lunatic'이라는 표현은 시쳇말로 어떤 사람이 '뿅갔다'는 뜻. 사람이 머리가 팽! 도는 순간 옆 사람이 잘 들으면 '뿅!'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모양이다. 서구인들은 13세기경부터 사람이 미치는 것이 달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위의 표현은 한 사람의 정신상태가 달 모습이 바뀌듯 계속 변덕을 부린다는 뜻에서 비롯됐고 'lunatic'이 노골적으로 '미친 사람'이라는 의미로 변한 것은 1377년 고대 불어에서였다. 달이 바닷물을 밀고 당겨서 밀물과 썰물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해변을 휩쓸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겠지. 사람 몸 혈액의 소금 농도도 바닷물의 소금 농도와 같다. 저 거대한 바다를 뒤흔드는 달과 지구의 애틋한 견인력이 나와 당신의 적혈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詩| 진공소제기

해와 달과 지구가 서로를 끌어당긴다 해와 달과 지구가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안달을 부리는 거예요 그거는 해와 달과 지구는 전생에 팽팽한 관계였대 그 쓸쓸하고 팽팽한 내막을 아무도 모른대 그들은 서로를 힘껏 빨아드리면서 점점 더 부풀어오를 것입니다 썰렁한 우주를 헤집고 해와 달과 지구의 먼지와 코로나 바이러스를 인정사정없이 흡수하는 휴대용 진공소제기 공허한 진공소제기 외로운 진공소제기 그게 당신의 유일한 무기일 것입니다 아까 그런 흉기를 손에 든 내 자세를 생각했다 © 서 량 2020.08.23

2020.08.23

|詩| 달 잡기*

달은 도무지 끝이 없는 추억의 늪에서 해상도도 촘촘한 컴퓨터 메모리로 내가 생각이 없을 때만 골라서 나를 찾아왔다 그건 그야말로 급습이었어 오해하지 말아라 내가 슬펐다는 게 아니라는 걸 달을 뜯어본다는 건 참 쑥스럽고 이상해 눈만 감으면 고만인 걸 달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양 손으로 꽉 붙잡았다 달은 아무 저항 없이 몸부림도 치지 않았다 달과 나 사이에 비가 주룩주룩 내렸어 오해하지 말아라 비속에서 누군가가 좀 심하게 울었다는 걸 © 서 량 2012.10.03

2012.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