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22

야생 찹쌀 / 김정기

야생 찹쌀 김정기 걸어온 길이 멍 투성이라 진보라 눈물 범벅 되었네. 생쌀 맛에 반하여 씹어 먹고 굵은 소금 야생의 덩이 핥으며 감추어 온 치맛자락 땅에 끌리네. 넓은 소금 밭에 굴러서 소금 꽃이 되는 누런 가을 볏단을 지고 벼꽃이 되는 나의 식탁에 피는 야생의 비린내 그 처참한 빛의 굴절 밀림에 사는 족속으로 모두 던져버리려는 순간 입 속의 쌀알은 녹지 않고 소금은 짠물이 된다. 씹어야 넘어가는 단단한 야생 찹쌀 한 알로 입 속을 맴도는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김정기 2009.06.23

꽃이 무겁다 / 김정기

꽃이 무겁다 김정기 양귀비 꽃잎 한 잎 땅에 떨어지니 지구가 기우뚱한다. 꽃 구들에 누어 단잠 자고나서 태워도 줄지 않는 땔감이 되는 꽃에게 말을 건다. 그 꽃 머리에 꽂고 손잡던 날이 있었던가 이제 당신 손에 내가 끌려가고 내 손에 당신이 다가오는 성근 머리엔 꽃구름이고 그래도 우리는 화원으로 가자 아직도 풋내 나는 눈물을 서로 닦아주며. 초록이 세상을 덮던 대낮 머리에 꽃 꽂아주던 사람이 뒤돌아보아도 그만인 사람같이 떠나버리고 남겨두고 간 흔적 땅을 파고 또 파서 기억의 통로에서 버려진 꽃잎 한 장 무거워도 바람이 되어 나른다. © 김정기 2014.12.8

빨간 사과 / 김종란

빨간 사과 -- 시리도록 아름다운 세상을 남기고 가신 소설가 김지원님께 김종란 녹음 우거진 공원으로 검고 긴 머리 휘 날리며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녀의 눈은 풍성한 머리 바로 밑에서 꿈꾸고 문자는 두 손에 가슴에 춤추는데 스무 살의 그녀는 갔다 시린 손으로 따뜻한 가슴을 안으며 바람 부는 곳으로 있지 않은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남겨 놓았다 그녀는 언제나 스무 살이다 백 년의 베개머리에서 미리 온 가을 햇살처럼 환하다 백발이 무성 하여도 그 가을 햇살에 찍힌 세상은 한 입 베어 무는 빨간 사과 시어서 눈물 맺히며 웃음 환하다 © 김종란 2013.02.05

누(淚) 2012 / 김종란

누(淚) 2012 김종란 슬픔을 간직하겠다 찾아 왔으니 품어 안고 본다 푸른 눈꽃 어룽지는 눈 들여다 본다 나의 손은 얼음 슬픔 안에서만 자유로운 얼음이다 우리 서로 손 잡을 때 슬픔은 빙하기에 든다 멀리서부터 기적소리 새된 슬픔의 소리 이른다 슬픔의 기관차는 육중하고 오래 되어 거칠다 일단 정지 신호를 무시한다 얼은 입으로 당신이 웃을 때 얼음조각이 비수처럼 빛나며 부서진다 우리는 동지이나 적이다 내 슬픔의 용량은 너에 미치지 못하니 나는 너를 품으면서 배척한다 비밀처럼 뿌리 내리길 향기 없으나 향기 예비한 그 미세한 파문 기억하지 주르륵 흐르는 눈물 웅크린 채 얼어붙은 두 손을 본다 © 김종란 2012.12.05

해녀 / 김정기

해녀 김정기 해녀는 찬바다를 헤엄치면서 악기를 만든다. 전복을 캐고 물미역을 뜯으며 첼로를 켠다 첼로 소리는 해상으로 올라오면 곡소리가 되고 깊은 바다 밑에서는 가곡이 된다 삭아빠지고 짓무른 육신은 조금씩 떨어져나가고 고무 옷에 지느러미는 햇볕을 받아도 번쩍이지 않고 어둡다. 해녀가 만든 악기에서는 ‘별이 빛나는 밤’이 흘러나올 때 평생 키워오던 돌고래에 먹힐 위험으로 물을 차며 도망친다. 이 엄청난 바닷물이 모두 해녀가 쏟은 눈물이라는 것을 돌고래가 알기까지는 해녀가 바다 속에 갈아앉고 봄이 떠날 무렵이었다. © 김정기 2022.05.14

겨울 담쟁이 / 김정기

겨울 담쟁이 김정기 땅을 박차고 시퍼렇게 얼어서 허공을 기어오른다. 잎 위에 눈이 쌓여도 녹을 때까지 답이 없다. 끝없는 질문의 문설주에서 속으로 뻗는 줄기를 억누르며 들키지 않게 속살을 키운다. 어둠이 그의 길을 막아도 태양을 만들어내는 몸짓으로 눈물도 없이 하루를 닫는다. 실핏줄에 동상이 걸려 얇은 살이 멍들어 번져가도 과묵하던 아버지의 품성 가지고 올라가고 오르고 또 오를 뿐이다. 작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혼자서 힘을 얻는 그는 숨결을 품고 창공에 집을 짓는다. 왕궁에 기왓장도 어루만지고 그보다는 빛나는 봄을 잡으려고. © 김정기 2010.01.12

시선의 끝 *히비스커스 / 김종란

시선의 끝 *히비스커스 김종란 깊은 그늘 틈틈 물기 흐르는 큰 붓으로 지워진 빈 계단 차콜의 대담한 선 어슷비슷 지어진 오래된 미술학교 어슷비슷 비어 있음! 드러난 순식간의 이름, 이름, 그림자들 불러들여 이름과 이름 달려 와 어둠의 등 등 등을 굽혀 깊은 그늘, 가장 어두워 비어있는 곳마다 드러나기도 하는 마릴린 몬로의 입술 비우다가 지어진 히비스커스 *로스코 채플, 너무 어두워 눈물 빛줄기로 쏟아지며 묵직한 붓의 움직임, 그 시선이 가는 * Hibiscus/하와이 무궁화, 꽃말: 섬세한 사랑, 신비한 사랑 ** Mark Rothko Chapel 시작 노트: 오규원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를 읽으면서 아 그런 시를 쓰고 싶다, 깊고 단순하고 투명한 시! 하다가 제가 매일 만나는 미술학교 ..

|詩| *카타토니아

숲이 긴장하는 순간 돌개바람이 불어온다 미생물은 우울하다 미생물이 얼어붙는다 미생물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미생물이 난데없이 우울증을 벗어나네요 첨벙, 강물에 뛰어드는 당신은 열대성 돌개바람 속 원시인 중증 정신질환자다 주기적 긴장증(緊張症)의 노예 옴짝달싹 하지 않는 미생물 숨도 쉬지 않는 생명의 노예다 * Catatonia – 두뇌활동이 정상이지만 대화를 시도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정신질환 증세, 때로는 몸 동작도 정지된 상태를 유지한다 © 서 량 2021.03.25

2021.03.25

|詩| 절대고독

나도 당신만큼 청승을 떨고 싶다 추석날 밤쯤 둥근 달을 쳐다보며 그렇게 눈물을 흘렸으면 분당 화장터에서 아버지의 혼백 가루를 가슴에 품은지 며칠 후 신세계 백화점에 꽉 들러붙은 영등포 타임 스퀘어의 겉으로는 아주 멀끔한 중국집이었다 2012년 8월 어느 날 저녁 대학 동기동창 열 몇이 같이 먹고 술 마시고 떠들었던 곳이 거기였다 지금껏 지 생명의 숨길을 지 스스로의 힘으로만 지탱해 온 걸로 마음 놓고 착각하며 야 너는 이제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전혀 못 알아보겠다 하며 자꾸만 웃어대던 곳이 바로 거기였다 그때 참으로 이상한 꽃 냄새를 푹푹 풍기는 고량주가 나왔는데 술 이름이 절대고독이었고 나는 절대로 고독하지 않았다 시간이 유유히 상승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그렇게 당신만큼 뜨거운 눈물을 흘렸으면 © 서 ..

2021.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