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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왔다 가듯 / 김종란

꽃이 왔다 가듯 김종란 끝자리 벚꽃 바람에 자유하듯 소리 마음껏 지르다 침묵하다 웅얼거리다가 꽃이 가는 소리 따라 검은 소 한 손에 잡고 신(神)과 더불어 간다 하늘 물든 손으로 감싸 쥐는 따뜻한 욕지거리에 차가운 기도(祈禱) 한점 날렵히/ 우짖는 짐승에 얹힌 잠잠한 신(神)의 눈길 맛있는 스시 깨끗한 접시에서 군더더기 없이 바라 본다/ 꽃 지는 소리 허기지며 자유하리니 멍에 벗는 소리/ 네가 왔다 가듯 © 김종란 2013.4.22

꽃과 인터뷰 / 김정기

꽃과 인터뷰 김정기 내 몸에 꽃이 피다니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구나 시간에 앉은 흠집이 언제부터 싹터서 꽃이 되었고 소리칠 때마다 자라고 있었구나. 꽃잎, 한 겹씩 벗겨내서 말 걸어보자 이제 보니 너는 꽃이 아니었구나. 타관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나에게 안겨와 언제나 비로 다가와 눈물이 되었지 반짝이는 것들을 향해 들어설 때 새벽잠 깨어 뒤척일 때 찔러대던 가시가 꽃이 되다니 시만이 살길이라고 달려온 길 모퉁이에서 세상과 잡은 손을 놓고 말았지. 언제나 불씨를 갖은 꽃은 떠나가는 계절은 떠나 보내며 그래도 너는 모두 거두어들인 들판에 말없이 나에게 와서 어깨를 기대는구나. 꽃의 입김이 따스한 것도 이제 알겠구나. © 김정기 2010.12.06

모래장미 / 김정기

모래 장미 김정기 골수에 단맛 다 빨리고 가슴에 꽂은 장미 사람들은 절하고 울음 울고 떠나지만 시선이 꽂히면 와르르 무너지는 꽃. 비단 자켓에 달았던 코사지 향기마저 갖추었네. 바위 결에 돋아난 그림 한 장 어두움은 언제나 당신 안에 스며들어 분명히 꽃이었던 자리에 피어나는 허공 물결을 잡으러 떠내려 왔던 개울가 자갈에서 꽃이 보이는 날 모래 장미를 달고 외출하면서 조금씩 더 수줍어하리 수집음이 슬픔이라 한들 당신이 나를 용서 할 수 있겠나 어머니 적삼에 달았던 꽃도 이제 보니 한 웅큼의 흰 모래였네 매운 무를 씹어 삼킬 때마다 꽃을 달아 주시던 모래 손. © 김정기 2010.10.12

꽃으로의 기행, 금문교 / 김종란

꽃으로의 기행, 금문교 김종란 누군가가 수 없는 누군가가 삶과 죽음을 던지면서 금문교 여기 사람 하나 오롯이 서 있듯 금빛 길 발끝에서 머리까지 들어온 금문교를 종단하다 아득하다 이제 머리에서 발끝으로 난 금문교를 걷다 안개가 수시로 감싸는 Golden Bridge 샌프란시스코는 검은 벚꽃나무 둥치 캄캄하고 암울하게 버티다가 꽃안개 인다 세어 볼수 없는 꽃 함박웃음 눈물 범벅이 된다 몇 권의 책과 그림과 음악을 묻는다 드러나며 감추는 삶의 안개 속 꽃으로의 기행 맑고 투명한 자멸의 열기 안개가 인다 송이 송이로 무수히 녹슬어 암담해 감당할 수 없어 꽃이 핀다 송이는 기울어진다 안개가 바람에 밀리듯 서늘한 입맞춤을 주고 받는다 © 김종란 2011.04.11

유월 꽃 / 김정기

유월 꽃 김정기 이해의 반이 지나간다고 꽃들은 아우성을 치는데 남의 연수 같이 낯선 오뉴월 볕 시간을 가로질러 온 울타리에 흰 꽃나무 눈송이 같은 꽃을 이고 소나기라도 지나는 날이면 나보다 먼저 몸 져 눕는 다 유월의 일기장 모서리가 흰 꽃잎에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칠월도 팔월도 있고 담에 기댄 장미도 울음 반 웃음 반 오후의 바람이 햇살 한 입 베어 물고 달리는데 어쩌란 말인가 또 다시 유월에 피는 꽃들마저 지고 있다니 다시 떠나간다니 이해도 조금씩 삭아가고 있다니 © 김정기 2010.06.18

젖은 꽃 / 김정기

젖은 꽃 김정기 세끼를 커피 숍에서 때우는 린다는 우리 집 단골손님이었다. 탐욕스럽게 샌드위치를 먹고 나서 냉수를 마시며 정부보조금을 아껴서 연명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도넛 하나를 주면 고개를 저으며 사양하다가도 돌아서면 게눈 감치듯 먹어치웠다 끝없는 식욕을 잡을 수 없으면서도 고요는 땅으로 가라앉아 켜를 이루고 린다의 평지엔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았다. 와인 빛깔 새 코트를 입고 온 날 아침 우리는 합창하듯 칭찬했더니 단 한 번 조금 웃어보였다. 포도주잔들이 쨍그랑 부서지며 그녀의 허기는 메워지고 있었다 혼자 있게 해 달라는 완강한 토라짐 대신 한 번쯤 무료로 주는 빵을 씹으며 쪼글쪼글한 입매에서 고맙다는 말도 새어나오고 그 얼굴은 젖은 꽃이었다. © 김정기 2010.02.04

보이지 않는 꽃 / 김정기

보이지 않는 꽃 김정기 돌아서면 보였네. 다가서면 져버리고 세상 넘어 외진 땅에 숨어서 피어 나에게만 보였네. 따스하게 꽃술에 볕이 들어 꽃잎에서 우러나오는 빛깔은 눈물 먹은 산색 같아 어둠에서라도 설레기만 하였네. 보이지 않아 여리게 더욱 어질게 고여 오는 봉오리 열리는 냄새 사방에 묻어나고 언제나 내 뒤에서 피고 지는 꽃 피는 얼굴과 지는 표정을 금방 알아차리는 나만 볼 수 있는 꽃 그대에게 보여주려 하면 보이지 않는 꽃 그러나 환한 상처가 되어. © 김정기 2009.11.23

|詩| 꽃에 관한 최근 소식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이 꽃을 면밀히 조사하는 동안 꽃 내장이 뭉그러지고 꽃 뼈가 으깨지고 꽃은 무색 무취의 기체가 된다 꽃은 항상 이름 없는 동작이다 당신이 한 송이의 꽃을 알려 할 때 당신이 한 송이의 꽃이 되려 할 때 꽃의 근엄한 칭호가 당신을 방해한다 우리는 묵묵한 꽃말 골갱이를 씹어 삼키고 너덜너덜한 말(言) 껍데기를 뱉어낸다 꽃말을 먹을 때마다 꽃이 되는 우리들 꽃보다 더 새빨간 몸짓으로 으스스 진저리를 치는 우리들 꽃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작이다 © 서 량 2004.03.04 2004년 5월호에 게재 『시문학』2004년 6월호에서 (페이지 177-182) 이달의 문제작: 중에서 -- 안수환 (시인) 의미의 해체. 시적 진실의 존재론적인 자기파괴. 시는 ‘의미’가 아닌 ‘사건’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발표된 詩 2022.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