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10

연두가 초록에게 / 김정기

연두가 초록에게 김정기 무릎 위로 꽃잎이 날아든다 내 자리를 비워 줄 차례를 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버티려 한다 사는 것이 어디 길가는 것처럼 되더냐 초록은 연두를 몰아낸다 하늘을 입에 문 초록은 잘 가라고 말한다 연두는 초록에게 막바지에 당신의 색깔이 파열될 때 나를 그리워하지 말라 나는 절벽을 걸어 내려간다 온 누리의 바람이 내 옷 깃에 스며들고 나는 새털같이 가벼워진다 무거운 초록을 입히지 않은 진득한 유월에 닿지 않은 몸으로 시간을 건너가는 눈부심으로 유유히 절벽을 내려간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의 긴 손을 잡고 © 김정기 2010.05.05

초록 멀미 / 김정기

초록 멀미 김정기 잎들이 밀려온다 도처에서 초록 폭탄에 맞아 숨졌던. 우리는 오랫동안 푸를 줄 알고 외면해버린 아까운 나날 이제 다시 색칠해도 빛 바래져 젖은 잎들만 누어있다. 어둡지 않으면 볼 수 없던 반짝임을 이제 나누어 갖으려 숲으로 간다. 당겼다 놓은 화살이 살갑게 박혀 올 때 불길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초록의 얼굴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져서 초록 그을음에 온몸을 사루며 세상 고개를 넘는다. 고향집 안방 벽지에 그려진 색깔에 구토하던 건방진 젊음이 흔들린다. 사방이 거무스름한 벽으로 다가오는 저녁마다 엽록소 한 방울에 타는 입을 추겨 잊어버린 이름을 떠올리면서 살아난다. 넉넉한 품에 숨어서 숨 쉬는 고요가 초록 번개에 기절한 낮잠을 깨운다. © 김정기 2013.07.08

|詩| 새벽 냄새

새벽에서 꽃 냄새가 난다 이상한 꽃 냄새 오후쯤에야 겨우 사라질까 말까 하는 뭇 별 냄새 내 쪽으로 오고 싶어 안달하는 은하수 냄새 얼추 회색인가 싶었는데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내 대뇌피질을 연신 건드리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산뜻한 빛의 율동 오래 전 음력설에 맡았던 영락없는 당신 색동저고리 냄새 © 서 량 2006.08.10 - 2021.08.16 (수정) 원본 - 세 번째 시집 (도서출판 황금알, 2007)에서

발표된 詩 2021.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