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10

|칼럼| 464. 왜 너 자신을 빼놓느냐

스티브는 전형적인 정신질환 증상이 전혀 없는 40대 중반의 백인이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고 변덕이 죽 끓듯 하면서 때로는 고집불통이고 걸핏하면 화를 낸다. 화가 치밀면 고함을 지르고 벽을 주먹으로 쾅쾅 때리는 버릇이 있다. 그는 수년 전에 저처럼 성미가 불 같은 걸프렌드와 한동안 같이 살았다. 그들은 언쟁이 잦았다. 여자가 집을 나가고 그는 심한 상실감에 빠진다. 이윽고 상실감이 분노로 변하면서 모든 세상 사람을 원망하고 저주한다. …스티브야, 너는 도대체가 왜 자기 자신은 제켜놓고 남들에게만 신경을 쓰면서 그토록 불행한 삶을 사느냐. -- 내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악의를 품고 나를 못살게 굴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러는 겁니다. …자신은 남에게 실수로라도 못되게 군적이 없느냐. – 나는 되..

침향(沈香) / 김종란

침향(沈香) 김종란 어두워진 후의 시간 눈을 감고 향을 찾는다 어두움 속으로 떠날 배낭을 꾸린다 익숙한 향 기도서 사진첩을 뒤적인다 향로(香路)를 찾는다 오래된 마음이 울지 않게 꽃처럼 부드럽게 자라고 있는 생각나무 숲을 낮게 비행하며 여리게 반짝이는 가장 오래된 눈물을 바라본다 침향(沈香) 잃었던 길 숨을 멈춘다 날개를 퍼덕이면서 일탈한다 물기 머금은 뜻 잠시 내려놓아 심해어처럼 다가 가 순이 움트던 어둠도 향기로운 새로운 소식으로 묻는다 © 김종란 2012.02.05

흰 종이 문 / 김종란

흰 종이 문 김종란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와서 그리는 풍경화 그 뒷면의 문 하나의 지문으로 문은 만들어져 하나의 지도를 따라 나가 돌아와서 다시 확인하는 흰 종이 문 어둠이 빛을 바라보다 물든다 신의 손을 잡고 부활절 달걀을 물 들이며 물이 든다 이무로이 먹성이 강한 물소를 몰며 나락으로 떨어지길 즐기는 짐승 낡은 셔츠처럼 부욱 찢어져 눈 앞을 가로막다 하얗게 빛나는 뼈무덤은 어느새 초록으로 빛나는 숲을 바라본다 계절의 뒤편 문을 밀면 신이 자비로이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 김종란 2011.05.02

겨울 담쟁이 / 김정기

겨울 담쟁이 김정기 땅을 박차고 시퍼렇게 얼어서 허공을 기어오른다. 잎 위에 눈이 쌓여도 녹을 때까지 답이 없다. 끝없는 질문의 문설주에서 속으로 뻗는 줄기를 억누르며 들키지 않게 속살을 키운다. 어둠이 그의 길을 막아도 태양을 만들어내는 몸짓으로 눈물도 없이 하루를 닫는다. 실핏줄에 동상이 걸려 얇은 살이 멍들어 번져가도 과묵하던 아버지의 품성 가지고 올라가고 오르고 또 오를 뿐이다. 작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혼자서 힘을 얻는 그는 숨결을 품고 창공에 집을 짓는다. 왕궁에 기왓장도 어루만지고 그보다는 빛나는 봄을 잡으려고. © 김정기 2010.01.12

천사 2 / 김종란

천사 2 김종란 초록빛 푸른 유리구슬 굴러간다 빛이 어두움에 접하는 속도로 일렁이는 불 어슬렁 어슬렁 엇비슷 그러나 다르지 마음 불 어두움은 빛으로 맞물리며 불의 인자와 속성은 대리석안 제주의 구멍 숭숭한 돌 혹은 매력적인 눈빛 돌의 재질 안 심지의 숨은 타닥타닥 머무르고 있어서 불의 전차를 타고 불의 지하철을 타고 불의 수바루에 시동을 걸면서 불의 *아다지오를 들으며 어딘가에 삐죽 삐져나와 있을 흰 날개 깃 너의 조도를 궁금해한다 밝음의 비래가 반딧불처럼 어룽질 때 숨이 타들어가는 잠시 칠흑의 어둠이라서 숨겨지는 큰 흉터 그 절실한 눈빛 *알비노니의 © 김종란 2010.02.01

|詩| 어두운 조명

색깔을 원했던 거다 입에 절로 침이 고이는 과일 그림도 좋고 열대 섬에만 서식하는 화사한 꽃 무리의 난동이라도 괜찮아 정물화가 동영상으로 변하고 있네 무작위로 흔들리는 미세한 바람이며 부동자세로 숨을 몰아 쉬는 새들이 어슴푸레 아울리고 있어요 흔적으로 남을 우리 누구도 서둘러 떠나지 않을 거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가물 빛을 흡입하는 색깔의 아우성을 듣는다 시퍼런 탐조등이 밤을 절단하는 어둠의 틈서리에서 우리는 몸을 뒤척인다. © 서 량 2012.01.25 --- 네 번째 시집 에서

발표된 詩 2021.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