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9

언어의 새벽 / 김종란

언어의 새벽 김종란 날개의 끝 출렁이는 생각의 끝 재즈의 도입부가 흐르며 4월 비의 새벽, 나무는 나무대로 하늘을 연다 틈틈 연하고 부드러워 새순들, 빗방울들 초록안에 스미듯, 부여 잡은듯 흔들리지 날개의 끝은 어딘가 사람은 사람대로 연 하늘에서 눈 깜빡일 새 물기로 흔들리며 줄 서는 언어들 빗방울과 언어, 재즈의 빛으로, 하늘에 끝없는 구름장 날개를 편다 이 물기로 된 날개를 © 김종란 2021.04.23

빗소리를 듣는 나무 / 김정기

빗소리를 듣는 나무 김정기 이제 나무 잎 위를 구르는 빗소리 그 착한 언어의 굴절을 알아듣는다. 몸에 어리는 빗방울의 무늬를 그리며 한 옥타브 낮은 음정에 울음이 배어 수군거리는 천년의 고요 안에 당신의 대답이 울려온다. 밤새 내린 비에 몸 적시고 서서 잎새의 속삭임에 귀 기우려 휘청거리는 나무의 눈물을 당신은 모른다. 혼자만 갈 수 있는 길 위에 비가 내리고 비의 말을 헤아려 일기를 쓴다. 산이 깊을수록 빗소리는 커져서 한줄기 빛이 되는 비밀을 터득하니 먼 곳에서 들리는 몸 떠는 소리를 이제 알아듣는다. © 김정기 2012.08.17

6월 도시 / 김정기

6월 도시 김정기 지난 봄 꽃들의 주검 위에 비를 뿌리고 내 품에 스며든 젖은 꽃잎 친구의 숨결 속에 가서 안기는데 영산홍 송이마다 햇볕 한 장 눈부시다. 뜨거운 뇌우도 번쩍일 푸른 숲에 아직도 남아있는 혈기를 다스리며 앰뷸런스는 도시의 정수리를 관통하고 허리 꺾긴 달력 안에 숨는구나. 남은 날들의 은빛 어깨에 기대어 빈집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 듣는다. 윤기 도는 솔잎들이 숨 가쁜 정오 도시를 밝히고 정돈된 거리에서 후둑이는 빗방울 맞으면 유월은 물결이 된다. 세월이 된다. © 김정기 2011.06.09

은빛 꽃 / 김정기

은빛 꽃 김정기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고양이는 여름마다 색맹을 앓는다 화초밭의 색깔 모두 빨아 먹고 물기마저 흡수한 그의 눈은 은빛만 보인다 찬란한 세상을 흑백으로 뒤집어 꽃피고 지고 이파리들 새순도 적요함으로 다스려 밑그림만이 선명하다 여름은 온통 은빛 빗방울이 되어 가는 길을 묻고 있는데 몸의 주름살 펴서 찬물에 헹구는 색깔이 없는 황홀함이여 윗동네 클린턴이 사는 차파쿠와 집값 같이 계절은 정확한 현찰이다 가늘고 굵은 선이다 가끔 우리 집을 기웃거리는 고양이의 눈에 보이는 빗방울은 은빛 꽃이다 © 김정기 2010.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