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17

전어구이 / 김정기

전어구이 김정기 지난 여름 가장 뜨거웠던 날 마당 어귀 잔디를 태우던 불볕 한 타래 먹어버렸다 몸에서 나오는 보드라운 가을볕에 나뭇잎의 피부는 헐거워지고 작은 몸에 오팔 갑옷을 입었다 솔가지 불 속으로 뛰어든 한입 살점 집 나갔다 돌아온다는 속설에 덜미 잡혀 저녁상에 올릴 쓸쓸한 반찬. 그동안 버렸던 꽃나무를 몸에 심고 언젠가 바다를 떠나 빛나는 모형의 비늘로 팔려가기를 기다린 차가운 눈빛은 연기에 묻혀있다 © 김정기 2013.10.03

바다 도서관 / 김종란

바다 도서관 김종란 잡은 것은 갈매기 깃이다 깃과 가슴의 흰빛 들여다보다 깜빡 종아리까지 파란 물이다 바닷물에 잠길 듯 떠있는 의자에 앉아 페이지 후르륵 넘긴다 빌딩 그늘 지나는 겨울 전차 소리 넘긴다 끝 여름 하얗게 불붙는 미루나무 울음 소리/ 깃을 들여다본다 눈 지르감다 깃을 덮는다 파란 물에 넘실대며 떠있는 의자 도서관 문은 임의로 잠기며 흰 갈매기들만 파도를 스치며 날아오른다 © 김종란 2013.10.07

15분 뱃길 / 김정기

15분 뱃길 김정기 쇠 침대에 누어서 바다를 본다. 바다는 술렁이며 몸에 와 감긴다. 초록색 긴 칼은 망명의 첫 밤을 다시 베어내며 흰색 홑이불 속에 안온한 주검을 깨운다. 간호사 마리아는 찬 손으로 뱃고동을 울리고 바다는 아주 조금 흔들린다. 막혔던 기도가 안으로 울리니 모진 말들이 사랑의 너울을 쓰고 15분 뱃길은 길고도 짧다 다른 사람들만 빠지는 줄 알았던 기계로 지어진 바다는 가을 벌판이다. 왼쪽 가슴에 닿았던 칼날을 거두고 반짝이 구두를 신으면 땅은 다시 꽃을 피워 휘청거리는 몸을 받아준다. 나흘 걸려 외운 방사선치료실 영문 표기판이 꿈을 꾼다. © 김정기 2011.10.09

푸른빛 나는 분홍 / 김종란

푸른빛 나는 분홍 김종란 유리병에 기대어 흰 장미가 만개했어요 바라보니 흰 장미 곁 푸른빛 나는 분홍 어른거려요 큰 언니 더 이상 많이 웃고 얘기 안 해도 돼요 코너에서 사람 바라보기 좋아서 사람 참 좋은 것이라 날려 다니다 잠시 멈춰진 구겨진 종이쪽 빗물이 조금 담긴 빈 소주병처럼 반쯤 그늘진 벽에 아무도 모르게 앉아 세월의 바람소리에 추임새를 넣고 있었죠 언니가 수 놓은 시간 아무도 모르게 흐르죠 절벽을 지나 푸른 강물을 지나 바다에 들었네요 파도 한 자락으로 솟구치며 망망대해, 언니 © 김종란 2012.06.11

바다시계 / 김종란

바다시계 김종란 초침을 감춘 바다 느긋하다 창문도 없고 현관문도 없다 하늘은 깊음으로 생명은 비릿함으로 안으며 표정은 더욱 부드러워진다 빛을 은닉한 *Renoir 의 'Spring Bouquet' 상처의 붉은 줄이 불현듯 빛나는 우리 우리 기다리다 빛을 은닉한 Renoir 의 'Spring Bouquet' 당신은 품에 안는다 낮아지며 깊이 깊이 스며든다 우연하게 여기 평안하게 바다를 숨쉰다 꼬리만 보이는 돌고래 바다 테이블 위에는 커피 한잔 해초처럼 흔들리며 이리 저리 몸이 기울어지며 바다를 마신다 용서에 익숙한 당신 바다를 등지다 바다에 안기다가 당신 안에서 바다를 밀고 간다 *Renoir (French 1841~1919) © 김종란 2011.10.04

길 없는 사람 / 김종란

길 없는 사람 김종란 집이 있어 모래 언덕이 나있다 나무 문 바다 향해 반쯤 열려 밀어보는 파도소리가 바다하늘 뇌수 가득히 들어와 갈매기 소리로 운다 상한 날개는 무겁다 햇빛에 부른 배에 빵 부스러기 넣으려다가 헛 구역질 한다 식빵 같은 길 한 방울 눈물은 눈가에 두고 문을 닫고 가버리는 사람들로 눈가에 자잘한 길들이 다져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생선처럼 퍼덕여 본다 가슴 안에 바다가 넘쳐 한없이 고이나 구름 한 조각 사랑 한 조각 삭힐 수 없어 서서히 부패한다 문이 덜컹인다 살아온 찌꺼기로 불 붙는 집 바다 한가운데 서늘하게 있다 © 김종란 2011.03.31

연금술사 / 김종란

연금술사 김종란 ICU 유리창에 늦은 오후의 햇볕 켜켜이 쌓이다가 스르르 연한 갈색으로 사라진다 산소 마스크를 쓰고 연금술사는 숨 가쁘게 내쉬고 있다 낡아 부서질 듯 서로 기대어 있는 아랫니가 이제 성벽은 곧 허물어지려 한다 들꿩 같은 풋풋한 가슴 슬며시 들여다 보던 검은 보석 한 쌍 그 고집스레 불붙던 두 눈 감겨 있다 女人을 향하여 미소 지으며 찬란한 빛으로 휘감던 변화무쌍한 저음의 목소리 들리지 않는다 이탈리안 담당의사를 거느리고 간호사 두 명 거느리고 느리게 암전으로 다가서는 유효기간 백 년의 라벨 이제 흐릿하게 지워진 채 매달려 있다 지금 이곳에 잠시 몸은 부려져 있다 백 년을 향해 무겁게 무겁게 떼어 놓는 발자국소리 연한 녹색으로 가라앉는 공기로 바다위로 떠오르다가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다가 그..

|詩| 대천해수욕장

11살쯤 때 대천해수욕장, 당신이 등허리 따끔한 타이어 고무 튜브를 타고 둥실 두둥실 떠 내려 가는 거지 파도에 밀리고 밀려 유년기 평화에 씻겨 해변이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면서 당신의 의식도 점점 깊어지는 거지 生을 들여다보는 공포와 부모 친구 사랑 모두 차가운 물살에 휩쓸리는 여름 한복판 멀리 멀어진 해변과 당신의 몸부림을 가느다란 거미줄이 이어주는 현실과 꿈을 맨가슴으로 판가름하는 당신이 힘이 풀리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지 11살쯤 때 대천해수욕장, 당신이 등허리 따끔한 해변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이 지금껏 둥실 두둥실 떠내려 가고 있는 거지 가면 갈 수록 더 깊어지는 검푸른 바다 속으로 © 서 량 1994.08.02 첫 번째 시집 (문학사상사, 2001)에서 수정 - 2021.07.30

2021.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