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 임의숙 장마 임의숙 헐은 담장 밑으로 날씨가 고인다 탄저병에 앓아 누운 시름이 고랑에 떨어진다 물을 주는 일도 약을 치는 일도 뚝 끊긴 예상이란 때론 빛 좋은 개살구 같아서 짓무르는 고추밭 수위를 넘나드는 장맛비에 힘없이 낡아가는 아버지의 한숨 강아지 나 몰라라 호박잎 들춰낸 공으..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7.17
손 / 임의숙 손 임의숙 손을 펴면 한 잎의 잎새 허공에 외마디 안간힘 그 손을 잡아준 적이 있는지 손을 오무리면 하나의 그릇 허기지고 차가운 빈 공간 그 손을 채워준 적이 있는지 손을 꽉 쥐면 한 자루의 망치 뭉치고 굳어진 아픔 그 손을 감싸준 적이 있는지 손을 흔들었던 안녕 저 편에 홀로 남은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6.05
낙타 안에는 사막이 산다 / 황재광 낙타 안에는 사막이 산다 황재광 벌 한 마리가 장미 속으로 들어간다 꽃은 천국의 문 젖과 꿀이 흐르는 곳 에덴의 수호 천사 미카엘처럼 장미 향기 흩뿌리며 문밖으로 나온다 또 다른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낙타가 사막에 산다는 말은 재 진술해야한다 낙타 안에는 사막이 산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5.06
자목련 / 임의숙 자목련 임의숙 자주 떨리던 잠이 손이 부끄러워 뿌리는 더 깊게 앓고 있었나봅니다 빛이 잘 드는 마음을 따라 가면 잿빛 상처도 아무렇지 않고 바람이 잘 들게 마음을 열고 보면 비가 내려도 피식, 웃음 뿐 한 순간, 하늘의 기억으로 사라진다 해도 새소리 맗게 머무는 등을 달았습니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5.03
사월의 꽃 / 황재광 사월의 꽃 황재광 I 사월의 마지막 날 꽃이 진다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다 한 겹 두 겹 감미롭게 씁쓸하게 꽃다움에 물들어 꽃들이 껍질(알맹이도 몸통도 없는 것이) 을 벗는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이 수상한 죽음 4월의 연출이 아니다 껍질과 꽃잎 / 알맹이와 쭉정이 오랜 이분법을 꽃이 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4.30
봄 소식 / 임의숙 봄 소식 임의숙 아침 까치의 울음이 되돌아오듯 비닐하우스에 빗소리 흐른다 밀지도 밀리지도 않는 겨울이 망부석으로 앉아있는 겨울이 궁시렁 궁시렁 흙 살이 터진다 갈까 말까 망설임이 반죽 곱게 치댄 진흙 아버지의 고무신에 찰싹 달라붙는다 아침 까치의 울음에 답례를 하듯 두엄..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3.10
첫눈 / 임의숙 첫눈 임의숙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을 앎니다. 솔잎향 가득 담은 소포 하나 받고 싶습니다 위로받고 싶은 아련함이 아픈곳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투정을 부리고 싶습니다 바람이 없더라도 흩어질 것을 앎니다. 하늘에 수많은 날개짓이 나방의 삶이여서 나는 꽃물든 눈물을 본적이 없습니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12.20
마음 / 임의숙 마음 임의숙 가만히 주머니 속에서 다독이던 말 몇 날 며칠을 넣고 다니던 말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뒤척이던 말 자꾸 한쪽으로 쏠리던 말 덧붙여 꿰매여 놓은 헝겁조각 같은 말 맡아놓고 들여다보지 않는 남의 것 같은 말 어느 날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드는 말 가만히 주머니 속에서 정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11.22
부부 연가 / 임의숙 부부 연가 임의숙 당신과 나, 찬물과 뜨거운 물로 만나 살아가야 하는 집은 수도꼭지 입니다 서로 다른 습성과 버릇 때문에 비좁고 가깝하고 숨통이 조여들어도 우리 감정을 나누며 적당한 온도로 흘러가야 할 시간 입니다 어느 날은 배수구 틈새에 살이 베이고 어느 달은 수문에 갇혀 주..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11.02
맑은 슬픔 / 윤지영 맑은 슬픔 윤지영 길이 끊어졌다 멀리 환하게 보이던 길이 끊어졌다 허공으로 날아간 말들은 어느 하늘밑에서 휘청대고 막다른 길에서 우리는 서로의 입 안 가득 돋은 푸른 멍들을 바라보고 있다 밤새 다듬어 고친 얼굴 새벽강물에 던지고 무향으로 가슴까지 차오르는 코코넛 모카향 모..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