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64. 인 마이 포켓

서 량 2020. 6. 1. 10:42

 

어릴 적에 가끔 듣던 엉터리 영어, 인 마이 포켓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길에 웬 푼돈이 떨어져 있길래 인 마이 포켓 했다고 좋아하던 동네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한 인터넷 콩글리시 사전은 이 표현을 ‘횡령하다, 착복하다’로 풀이한다.

 

푼돈이 아닌 엄청난 금액의 공금을 한 여자가 인 마이 포켓 했다는 의혹이 연일 신문에 실리는 2020년 5월 말경이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더니 자기 돈이 아닌 돈을 자기 주머니에 꾸역꾸역 넣다 보면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 금액이 점점 커지는 이치에 실감이 간다. 주인 없는 물건이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공금을 고의적으로 축내는 짓을 시쳇말로 도둑질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위선을 싫어하는 당신은 횡령이나 착복 같은 어려운 한자어보다 도둑질이라는 알아듣기 쉬운 말이 더 귀에 쏙 들어오지 않는가.

 

횡령(橫領)을 사전에 ‘남의 물건을 제멋대로 가로채거나 불법으로 가짐’이라 나와있다. 이때 ‘가로 橫’은 횡포, 횡행, 횡설수설, 하는 바로 그 ‘횡’이다. 위계질서 유지에 몰두하던 고대 중국인들은 수직적 의식구조를 권장하는 세로(縱)가 바람직하고 수평적 사고방식을 조장하는 가로(橫)는 께름칙했던 것이다. 그런 언어습관을 이어온 우리말에서도 남의 돈이나 물건을 ‘가로채다’는 말은 있어도 ‘세로채다’라는 표현은 없다. 횡단보도, 횡격막 같은 중립적 현대어들이 있을 뿐.

 

착복(着服) 또한 이상한 말이다. 옷을 입는다는 뜻 외에 ‘남의 금품을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함’이라고? 어찌하여 옷을 입는 것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과 같은가. 옛날 중국인들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후에 그 옷을 영영 돌려주지 않고 인 마이 포켓을 했다는 말인가.

 

‘삥땅치다’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 할 돈의 일부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행동을 일컫는 속어다. 화투 노름에서 유래했다는 이 말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하는 소규모의 절도 행위를 뜻한다.

 

공금횡령은 몰염치하고 치사스러운 짓이다. 요즘에는 도둑이 몽둥이 들고 나서는 정신상태가 유행이다. 엊그제 한국 티브이 드라마에서 “적반하장도 가분수(假分數)”라 했다가 유분수(有分數)라고 누가 옆에서 고쳐주는 장면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도둑이 도둑을 알아본다는 말도 있다. 한 횡령 용의자가 자기보다 더 널리 알려진 다른 범죄 의혹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의 후광에 힘입어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한통속으로 몰아붙인다. 도둑이 개 꾸짖듯이.

 

‘embezzle, 횡령하다’는 13세기경 고대영어와 불어에서 단순히 훔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서 그 뜻은 하인이 주인의 물건을 도둑질한다는 의미로 변했고 영국의 헨리 8세가 국법으로 엄벌에 다스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구인들의 절도행각은 상하관계에서 일어나는 수직적인 사건이었다. 옛날 중국인들은 물건을 ‘가로챘’지만 그들은 물건을 ‘세로챘’다는 신조어를 도입한 대조가 재미있다.

 

‘kleptomania, 절도벽’이라는 아주 애매한 정신과 질환이 있다. 이 말은 라틴어와 희랍어와 전인도 유럽어에서 훔친다는 의미의 ‘klep-‘에서 유래한 진단명. 19세기 초기에 남의 물건을 함부로 훔친 귀족들을 법정에서 정상을 참작해 주던 이유로써 당시 세간의 조롱을 받던 용어라 한다.

 

상습적으로 공금에서 삥땅을 치거나 바늘 도둑이 아닌 소 도둑질을 하면서 인 마이 포켓을 해온 의혹을 받고 있는 저 여자가 ‘인 마이 포켓벽’이라는 새로운 정신질환의 피해자라는 변론이라도 나오면 어쩌나 싶지.

 

 

© 서 량 2020.05.31

--- 뉴욕 중앙일보 2020년 6월 3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8349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