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밭
임의숙
밤나무 아래 배추밭
찬바람 들어 햇살 식은 지푸라기
질끈 동여맨 손끝을 놓았는지
겹잎들 수그러져 있다
철없이 우거졌던 잡풀들 한 쪽으로 돌아눕고
줄줄이 여물은 실한 포기들
비탈진 고랑들이 한 자루씩 들려보내면
흰나비 길을 따라 고랑들 흩어진다
녹물든 호미손 이제야 한가로운지
산개울 소리에 씻어 맑갛게 걸어두고
사나운 흙, 길들이던 호미손 근심들은
산그늘 밑에 돌무덤으로 쌓여있다
산까치 기쁜소식 야속다는 것을
밤나무는 모르는 척, 윗 가지를 흔들었고
어머니 땟자국 헐어 빳빳해진 흰수건이
매끈한 알밤에 볼룩 웃는다
못난이 배추 몇 포기 자기 모습이듯
어머니, 눈길 멀지않게 두고 본다
저 잎들 서리에 얼어 바삭 거릴지라도
겹겹의 나이테 속에는 세월이 옹골지다
밑둥 잘린 자리마다 시들은 겉잎들
아침마다 개지 못한 내 유년의 이불같아
빈 밤송이들 따갑게 굴러 다니고
솔잎 익은 연기의 저물녁이
밥먹어라, 부르시는 온기로
어머니 서리찬 배추밭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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