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글동네/시

립스틱 / 임의숙

서 량 2015. 1. 28. 01:39


립스틱


                     임의숙



나는 분홍을 신뢰합니다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어 눈에

띄지 않는 다는 안정감 때문 입니다

오늘 젖은 꽃송이는 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담글 수 있는 거울 속 빗물은

극한 감정이 없는 이슬방울들입니다

장마철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서

온가족이 흠뻑 핏멍에 젖기도 합니다만

몬르에게는 비가 자주 내렸습니다


장미가 피었습니다

빛이 농염할 수록 나이가 든다는 징조라지만

몬르에게는 자신감의 비법 같았습니다

부럽기도 안스럽기도 한 자태는

나비 한 마리 날아들지 못하도록 매끄러웠습니다

비가 거셀 수록 흑장미의 극치로 달아오르는 꽃잎

겹겹이 단오한 의지는 빨강을 마주 할 때마다

몬르의 얼굴이 익숙하게 떠 올랐습니다

용기라고 해야 할지, 반란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의 꽃송이가 조금씩 붉어갈 즈음


꽃이 사라졌습니다

딸꾹질처럼 틔어나오는 의문을 벗느라

내 집처럼 드나들던 문이 낯설어 신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짓무른 물집들이 키워낸 억새들이 무성해서

웃음은 희게 마르는 건지

목젖에 고인 빗물에서 악취가 난다며

썩은 통증을 뽑아내 툭, 던지듯 이혼했어.

떨어진 꽃송이가 아득해

붉음에도 여러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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