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글동네/시

벽난로 / 임의숙

서 량 2012. 1. 13. 23:07

 

벽난로

 

                 임의숙

 

 

철문이 열리자 고요가 성큼 걸어 나온다

허연 각질로 흩어지는 발자국들 사면 받는 날,

한 동안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죄를 지었나요?

  솟구치는 그래프에 금빛이라도 묻혀 볼까 해서요 은행나무 황금알을

살살 밀어 봤어요 나무가 휘어지며 저를 밀쳤어요 사거리 삼층 건물에

곤두박질 쳐졌지요 잘 아시겠지만 밀리고는 못 사는 성질 이라서 다시

찾아 갔다가 몸싸움이 벌어졌어요 그 때 나무의 팔이 툭 부러졌습니다

  가장 온순하다는 봄바람 변호사로 합의를 보려 했는데요 은행이라는

곳이 본디 타협을 원하지 않아요 유연성도 없고요 늦여름 소나기 지나

가길래 협공으로 은행나무 정강이를 붙잡고 뿌리를 뽑아 버렸죠

욱 하는 성격 때문에......

 

지난 가을 대법원장님 까마귀 굴뚝 단상에 앉아 제법 근엄하신 판결

문 낭독을 경청 한 적 있다

어찌나 칼칼하고 우렁찬지 구름이 흐릿하게 오줌을 저렸고 지은 죄 없

는 이웃집 맥스가 허공에 컹컹 자백서를 쓰고 있었다.

 

토막난 장작나무 아래에서는 피해자도 피의자도 없는 법

총탄을 맞은 혁명가도 일국의 왕세자비도 부끄러움을 한 입씩 물고

죽었다

훔쳐본 눈빛도 맹렬하게 달아 오른 식탐에 부은 입술도 검은 죄,

한 줌의 재로 속죄 받는 날 영혼은 훨훨 흰 날개를 달고

 

한 계절 한 계절 쌓아 올린 의뢰인들의 서류뭉치 신문 다발

법정 싸움은 빨간 두건이 터져야만 시작 된다는데

증거물인 성냥이나 동일한 라이터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김정기의 글동네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가죽 구두 / 황재광  (0) 2012.01.18
겨울새의 언어 / 최양숙  (0) 2012.01.18
마이산 능소화 / 송 진  (0) 2012.01.04
베갯잇에 사는 달팽이 / 임의숙  (0) 2011.12.23
유령의 도시 / 송 진  (0) 2011.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