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詩| 지독한 에코

서 량 2022. 3. 19. 19:34

 

뚜껑을 덜거덕 열고 장독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푹 박고
들여다보면 내 사랑을 둥그렇게 구획하는
경계 안의 컴컴한 내막이
아우성치는 무시무시한
에코가 얼굴을 때린다
정신이 얼얼해지고 기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금방 지나간 듯 
귀가 멍멍해지는 에코!
지구가 암흑 속에서 꿈틀대는
격렬한 동작 값싼 교훈 같은 거를 들먹이는
고대소설의 권선징악
마음 착한 남녀가 막판까지
살아 남는 사연 그리고 또 있다 시인들은
너 나 다 아름답다는 망상 등등
하여튼 간에 빈 항아리 속에서 아! 하는
지독한 에코 때문에 지성이고 쥐뿔이고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아늑한 이기심이 솟는다
아무 것도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며 항아리에 곰곰이
귀를 기울이다가

 

© 서 량 2005.12.28

<현대시학> 2006년 12월호에 게재

 

시작 노트:
17년 전에 쓴 시를 다시 들여다본다. 또 이런 시를 쓸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잠시 자가 정신분석에 몰두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의도적으로 아어(雅語)와 아문(雅文)을 피하는 성향을 드러낸다는 점. 왜 그럴까. 대충 짐작이 간다. 자세한 내막은 비밀에 부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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