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詩| 피아노 치는 여자*에게

서 량 2022. 4. 11. 18:09

 

피아노는 늘
육체를 다스리는 풍습에 젖는다
열 손가락으로 광! 광! 두들기는
말초신경의 뻔뻔함으로
육체를 거부하는 생리를 잘 알고 있는
피아노 치는 여자는

검정 속옷과 스타킹
어지러운 손가락 놀림
발밑에 눌리는 소프트 페달만으로
피아노는 충분히 남자의 함정이다
피아노 치는 여자 목 아래로 푹 파여 있는
아늑한 함정이다

육체는 육체끼리
영혼은 영혼끼리
따로 떨어진 연습실에서 음계연습을 한다
머리를 잘 빗지 않는 남자를
자신에게 단단하게 묶어 두기 위하여
오늘도 밤늦도록 피아노 치는 여자여
이룰 수 없는 사랑,
저 싱싱한 페미니즘이 붉은 피를 흘릴 때
슬며시 고개를 드는 휴머니즘을 위하여
나를 때려 다오, 피아노 치는 여자여
여지 없이 나를 발로 짓눌러 다오
새까만 그랜드 피아노 소프트 페달처럼

 

* 피아노 치는 여자 - 200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1946~)의 대표작 소설 제목

 

시작 노트:

옛날에 쓴 시의 모티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가 일회용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내 아들이 남처럼 보이듯이 내 시가 남의 시처럼 느껴진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에 홀딱 반해서 이 시를 쓴것 같다. 비엔나 컨서버토리에서 올간 전문으로 졸업했지만 평소에 피아노, 기타,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했던 그녀. 비엔나 대학에서 음악역사학을 공부하다가 한때 불안장애증으로 학업을 중단한 적도 있다.  20년을 공산당원으로 지내기도 했던 그녀에게 수여된 2004년 노벨 문학상은 “소설과 희곡 속에서 상투어와 그 압제적 통제력이 지배하는 인간사회의 부조리를 엄청난 언어의 열정으로 밝혀내는 목소리와 그 반대 목소리의 음악적인 흐름”이라고 그녀를 치하했다. 18년 전에 이 시를 쓰면서 인간 속에 내재한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 가학피학성性愛)을 선명하게 묘사한 그녀에게 깜짝 놀랐던 느낌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다. 언제 시간을 내서 유튜브에 있는 프랑스 영화 'The Piano Teacher'를 봐야겠다. 참참, 원본 제목은 '피아노 치는 여자'가 아니라 '피아노 선생'이었다.

 

© 서 량 2005.02.09 -- 세 번째 시집 <푸른 절벽>(도서출판 황금알, 200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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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절벽 - 교보문고

서량 시집 | 1994년 「조선문학」으로 등단한 서량 시집. 정신과의사인 그가 시의 상당 분량을 정신과의사와 환자와의 대화를 취급하고 있다. 또한, 항상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객관적인 표현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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