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6

|詩| 눈을 크게 뜨다

눈(眼)은 야만적인 상태에 존재한다 -- *안드레 브르통 (1926) 빅뱅이 사라지자 금세 새롭게 생겨나는 샛별을 보세요 구름빛 소파에 앉아서 당신이 말한다 빨강 노랑 파랑 풍선 낯익은 얼굴들을 봐봐 빅뱅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무더운 공기 사방팔방 풀려나는 지구보다 몇 백 배 더 큰 생물 무색 무취 무미 아메바 짚신벌레 등등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 모습 어디가 야만적이지 저 샛별 어디가 야만적이지 * Andre Breton –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성명서를 발표한 프랑스 정신과의사, 시인, 초현실주의의 태두 시작 노트: 정신과의사 앙드레 브르통은 프랑스에서 초현실주의 시를 쓰기에 바빠서 '의사짓'을 포기했다. 그 즈음 미국의 소아과의사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는 꼬박꼬박 의사짓을 하면서 시시때때 처방전에 시..

2022.11.26

|컬럼| 403. 아령의 흉터

맨해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2021년 11월 현재 전시중인 ‘Surrealism Beyond Borders’를 관람했다. ‘경계 없는 초현실주의’의 황홀한 시간! 프랑스 시인, 정신과의사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986~1966)이 1924년에 선포한 ‘초현실주의 성명서’를 곱씹는다. 그의 폭탄 선언은 시(詩)에서 출발하여 모든 예술 분야에 걸쳐 전세계에 들불처럼 번졌다. 브르통은 당시 프로이트가 주창한 ‘무의식’과 그의 획기적인 논문 ‘꿈의 해석’에 큰 영향을 받았다 한다. 초현실과 꿈은 무의식의 텃밭에서 피어나는 의식의 꽃이다. 초현실의 뿌리에는 무의식이라는 본능이 도사리고 있다. 초현실에는 심리적 안전을 꾀하는 방어기전과 성적본능의 줄기와 잔가지들이 숨어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

|컬럼| 402. 꽃의 맛

옛날 정신과 수련의 시절에 어느 우울증 환자에게 “Keep your chin up! (턱을 치켜 드세요! - 힘 내세요!)”라 한 적이 있다. 그 퉁명스러운 60대 여자는 그런 말은 자기도 할 수 있다면서 발칵 화를 내면서 방을 나가버렸다. 낯이 뜨거웠다. 지도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건 마치도 우울증 환자에게 우울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충고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가 말한다. 내과의사가 배가 아픈 환자에게 아프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싸가지 없는 말을 한 셈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행복하세요! 하는 싸구려 입버릇처럼.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나중에 ‘will power, 의지력(意志力)’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입에 올렸다. 그게 뭔지 모른다며 설명을 해달라 해서, ‘will’은 의도(..

|컬럼| 394. 하늘에 사람이 나르샤

병동환자 매튜가 하는 말을 직원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 나 또한 그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다 파악한다. 그의 심중을 눈치로 때려잡는다. 매튜는 자기를 이해하는 나를 좋아한다. 정신과의사는 환자의 말을 귀담아듣는 일이 천직이다. 환자가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 냉정한 평가를 내리면서 무슨 말을 하는가, 하는 내용(content)보다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형식(form)에 더 신경을 쓴다. 폼생폼사다. 말이 즉 생각이다. 말의 형식이 일반인들과 크게 어긋나는 경우에 ‘formal thought disorder, 형태적 사고장애’라는 전문용어를 쓴다. 바쁜 세상에 사람들 간에 오고 가는 의사소통은 일단 구색만 갖추면 너끈히 통한다. 말은 ..

|컬럼| 392. 마네킹

우연히 인터넷에서 구석본(1949~)의 시, “마네킹의 눈물”을 읽었다. (시로 여는 세상, 2018년 여름호) 얼굴을 뭉개버렸다 눈을 지우고 코를 지우고/ 입조차 깨끗이 뭉개버린 다음/.. 하며 시작했다가 나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뜻밖에도 당신,/ 나 아닌/ 당신의 원형이 떠오른다.//.. 실로 감동 어린 부분이다. 점포를 닫는 상가의 쇼윈도 바닥에 마네킹이 반질반질한 맨몸으로 팽개쳐 있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마네킹은 눈을 빤히 뜨고 옆으로 누워 있었는데 나는 마네킹이 속으로 울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시인은 얼굴이 뭉개진 사람 모양의 물체를 과학적 시선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시인은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보는 재능을 발휘하여 모종의 신비한 메커니즘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