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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 시(詩)의 매혹 / 김애리

서 량 2016. 12. 17. 20:35

[삶의 뜨락에서] 시(詩)의 매혹 
김애리 / 수필가   

  •            [뉴욕 중앙일보] 발행 2016/11/25 미주판 16면 기사입력 2016/11/28 08:35


참으로 오랜만에 책상에 앉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매번 그리워하며 매일 등한시하던 글쓰기, 책상의자에 궁둥이를 앉히는 행위로 오랜만에 돌아갔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랜 게으름을 떨치고 나로 하여금 미친 듯 감성의 촉수를 건드리며 돌아가게 한 근원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꿈, 생시, 혹은 손가락” 이 낯설고도 생뚱맞은 제목으로 네 번째 시집을 낸 서량 시인의 시집 출판기념 회식 후 봇물처럼 터진 창작의 욕망이다. 잠자던 감성을 깨워내 송두리채 뒤엎어 다시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가까이 하고픈 애증의 문학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게 하는 파워풀한 시집 상장에 박수를 보낸다.


바쁜 생활 속에 문학의 관심은 무엇이며 대체 시는 왜 쓰는가? 단 한 권의 책을 읽지 않아도, 단 한 줄의 시를 음미하지 않아도 삶은 굴러간다. 먹고 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헌데, 왜? 무엇 때문에 한 줄의 시어를 길어 내기 위해 책상 앞에서 땀 흘리는가? 아마, 그 답변이라면 시 쓰기란 삶을 좀 더 진지하게 사유하려는 욕망의 거친 몸부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매일 대하는 사소한 일상과 도처에 부딪치는 부정하고 싶은 낯선 타인의 뒷모습 속에 결국 나의 속내를 발견하는 타자와 자아의 깊은 교감이다. 시의 매혹은 분명, 날카롭고 깊게 사람의 이면의 심중을 과녁 한다는 것인데 결국 인간에 대한 깊은 배려와 이해다. 삶의 아픔을 뛰어넘으려는 안간힘의 밑바닥 분출의 공유, 내게, 시를 쓴다는 것은 내면과의 독백이며 인간적인 소중한 고독을 연마하여 풀어내는 언어의 결정체를 찾아가는 고독한 여정의 순례의 길이며 삶의 힐링의 또다른 몸짓이다.

넋두리가 길었는데 오늘 서량 시인의 시집출판 기념 회식은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나에게 제자리란 어느덧 문학인 듯하다. 서량 시인은 정신과 전문의이며 그의 대니 보이(Danny Boy) 색소폰 연주를 들으면 뇌섹남의 극치의 정점을 찍게 하는데, 해박한 지식과 깊이 있는 철학적 사고에 미리 겁먹고 질리곤 한다. 컴컴함도 아닌 그보다 질이 독한 깜깜한 밤에 괭한 눈을 뜨고 헐렁거리는 잠옷을 입고 새벽에 악몽에 깨어나 혹시, 그에게 전화를 건다면 기꺼이 받아줄 것만 같은 그는 인상부터 아주 편한, 소름끼치게 냉철한 탐구하는 지식인이지만 웃음이 늘 얼굴에 가득한 가까운 위안인 뉴욕의 시인이다. 이 시인이 초현실주의 시의 특성을 십분 엿볼 수 있는 있는 “꿈, 생시, 혹은 손가락” 시집을 출간한 건 현대시를 공부하기 힘든 외국 땅에서 커다란 수확이라 생각하며 그의 빛나는 실험 정신에 힘껏 박수를 보낸다.


시인은 독특한 시의 구조에 인간의 각박한 현실은 이룰 수 없는 꿈을 그리워하지만 또한 막막한 꿈은 차라리 현실을 그리워하는 이중 구조의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흐름 사이에서 허튼 독백을 미려한 대화체로 이끌어 갔다. 결국, 뼈저리게 아픈 마지막 구제는 자신이라는 것이 이 외경한 시집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시의 미학이란 현실의 거친 고통을 통과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며 조심스럽게 내일을 타진하는 절제된 언어의 표현이란 생각이다. 분명, 몸서리치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올해 내가 접한 시집 중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비논리적 넋두리를 가장 논리적 시적 언어로 풀어헤친 시, 명쾌한 시어의 유희!, 가까운 뉴욕에 이런 시인이 있음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영혼을 물속에 담근다/영혼이 빨갛게 달아오른다/영혼은 뜨거운 동시에 차갑대요/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물의 힘/새파란 우리 무의식/(반신욕 중) 한 줄의 시가 나의 상처를 보듬는다. 생생한 시어에 무릎 꿇는 황홀한 새벽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