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 6

가을 문(門) / 김종란

가을 문(門) 김종란 문은 열리며 닫힌다 아귀가 맞지 않는 문 건조한 열기에 뒤틀리어 덜거덕거린다 문 턱에 걸려 넘어진다 숲을 이루던 푸르른 미소 낮은 곳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다 숨겼던 눈물 떨어지는 곳 구부리고 신발 끈을 다시 맨다 노란 잎 뒹굴듯 뒹굴듯이 일어서다 순간 빛나며 쌓여 있다 호흡하며 일어선다 적막(寂寞)에 귀 기울인다 신라 시대에도 네가 그랬듯이 강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불어 가면 문이 열릴 것이라고 몸을 가볍게 말려 노랗게 흩어지며 목이 긴 새와 함께 나른다 © 김종란 2013.09.18

잎새의 가을 / 김정기

잎새의 가을 김정기 지금 떨고 있다 햇살에 꽂히려고 몸을 비틀면 더욱 눈부시게 떨리는 침엽수 뾰족한 잎. 한 세상 부딪치며 잡던 손, 한번 다시 스치기만 하고 놓아 줄 것도 없는 키 큰 나무가 무서워 허공을 뛰어내리는 잎새의 곡 소리 안개도 문을 닫고 아는 기척도 없다. 분배된 땅에는 이름 짓지 않은 하늘이 여전히 푸르다. 빛나는 지난 날은 휘어서 삭아가고 떠나는 옷자락 부여잡고 엉킨 실 풀어놓으려 하니 어느 거대한 바람이 번져서 물결이 되어 후두둑 지난 날 빗방울도 데려오는 기나긴 잠이 든다. 숨겨두었던 날카로운 눈초리 한번 써먹지도 못하고 들켜버린 잎새의 가을. 조용하다, 적막조차 떨린다. © 김정기 2009.09.25

여름 강을 건너는 시간 / 김정기

여름 강을 건너는 시간 김정기 오후 땡볕을 달래는 강물소리에 여름을 덧입고 뒤 돌아보니 세상은 뜨겁게 달아 올라도 지나온 발자국은 차겁기만하다 목이 마른 바람 소리가 닥쳐온 계절의 옷깃을 잡고 오래 찢기고 바스러진 것들이 무성하게 푸르러 강물과 동행한다 가쁜 숨으로 적막을 조우하는 시간을 잠그고 조금씩 여름날을 베어먹는다 어지러운 증세가 녹아 강바람으로 떨리는 피안을 향해 손사래치며 일어서는 강물 문고리를 잡고 허기지고 삭은 오늘을 추스려 한 걸음씩 이 땅에 없는 빛으로 다가 간다 © 김정기 2021.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