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15

|컬럼| 217. 내 말이!

내 말이!  말도 안 되는 오해 때문에 환자가 내게 쌍소리를 한다. 영어로 듣는 욕, 'four letter word'는 우리말 육두문자(肉頭文字)에서 오는 짜릿한 굴욕감이 별로 없다. 양키들의 욕은 스펠링이 네 개이므로 발음도 짧다. 허기사 우리말 욕도 짧기는 마찬가지다. 자고로 욕이란 화급하고 간결해야 제 맛이 나는 법! 그 분열증 환자에게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라며 타일러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의사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ah, and uh, even when you say the same word!' 하며 순 한국식 영어를 하는 환상에 빠진다. 말(言)의 어원을 찾으려고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을 쏘다녔지만 헛수..

|詩| 데이트

데이트 울긋불긋2중주 green 병아리 yellow약속은 運指法 손가락 연습이다토끼털 스치는 입술이 아프도록늦었어요 늦지 않았어 전생 후생을 송두리째 망각하는 당신                                                            詩作 노트:전생과 후생을 뛰어다니는 열살 짜리 Alice in Wonderland. 시간약속을 지키려는 토끼. ⓒ 서 량 2024.10.26

꽃이 지는 이유 / 김정기

꽃이 지는 이유 김정기 꽃이 지는 것이 혹시 내 잘못이 아닐까 책상 위를 기어가는 벌레 한 마리 잡아서 바람에 꺾인 나무 가지를 내버려두어서인가 추위에 떠는 옆집 개를 그냥 바라만 보아서인가 새로 피어나는 연한 잎을 끓는 물에 넣은 탓일까 곁에서 빛나는 사람들 이름도 나와 함께 흐려지고 햇볕과 시간이 공모하여 제철이 저물어가면서 나도 시들어 사방으로 흩어지며 떨어지고 있으니 꽃들도 동행이 되려고 지고 있는 것일까 검은 흙에 묻히려고 설레는 것일까 꽃이 저야 떠난 사람이 돌아온다고 약속을 지키려고 지고 있는지 땅 위에 떨어진 꽃잎을 집어 들으니 흘러간 날의 황홀한 필름이 혈관에 스며든다 조치원 역에 서있던 꽃다운 당신이 선명하게 상영된다 막을 내리지 않고 눈물겹지 않게 아직도 숨이 멎듯 달콤하게 그래서 꽃..

빈 병 / 김정기

빈 병 김정기 빈 병에 마개를 덮는다. 바람이 들어가 흔들리면 시간이 할퀴어 삭아지면 이 병에 들어있던 녹쓴 칼 한 자루 다시 벼려서 쓸 수 없을까봐 이 병에 넣었던 꿀물 엎질러 진지 오래되었고 쓰고 신 맛에 길들이지 못하고 토해내던 너무 맑아서 깨어질 듯 한 병 하나 품고 있네. 지독한 오한과 목마름도 여기 담겨있었지 저장되었던 그리움의 더께도 문질러 헹구었네. 비워 놓은 병에 드나들던 약속도 저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몸은 나를 떠나가고 있네. 조금씩, 시나브로. © 김정기 2012.10.11

입춘의 말 / 김정기

입춘의 말 김정기 땅속에서 벚꽃이 피어 속삭이고 있다. 진달래의 비릿한 냄새 스며들어 신부를 맞으려고 흙들은 잔치를 벌이고 있다. 작년에 떨어진 봉숭아 씨앗이 겨드랑이로 파고들어 연노랑 웃음을 감추고 있다. 몸 안에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수 천 년 가두어 둔 바람이 새 옷을 준비하고 덜 깬 잠에서 흐느끼고 있는 벌레가 나비의 발음으로 말을 걸어온다. 꿀벌의 몸짓으로 노래 부른다. 지하에 준비된 봄의 언어를 목청껏 뱉어보는 새벽 품에서 자란 새들이 날개를 달고 돌아 올 수 없는 시간을 물고 반드시 약속은 지키겠노라는 입춘의 말을 듣고 있다. © 김정기 2010.01.26

|詩| 가을의 난동

심지어 캄캄한 우주 깨알만한 은하수까지 움켜쥐는 엄청난 기력입니다 떡갈나무들이 허리 굽혀 옷을 벗는다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추억, 추억 전신이 땅거미 저녁 빛, 오렌지색 황혼 빛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몸부림, 몸부림이 목숨을 거는 모습이다 슬픈 기색이 없이 눈물 따위 글썽이지 않으면서 심지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깁니다 시작 노트: 옛날에 써 두었던 시를 혼쭐나게 많이 뜯어고쳤다. 시를 쓰다 보면 그저 만만한 게 계절을 주제로 삼는 짓이다. 특히 봄이나 가을을 우려먹는다. 전에 이라는 시를 쓴적이 있다. 이번에는 이다. 맞다, 맞다. 계절은 내게 반란을 이르키고 난동을 부린다. 그런 어려움을 섭렵하겠다고 덤벼드는 나도 참, 나다. © 서 량 2008.10.14 – 2022.11.17

2022.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