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1

카이로스*의 잠 / 김정기

*카이로스의 잠 김정기 냇가에 앉아 있으려고 집을 나섰다 닳지 않는 펜을 집어 들고 흐르는 물에 헹구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하늘을 퍼다 바위 위에 깔아 놓는다 카이로스는 언제나 하늘 위에 누어 선잠을 잔다 내 몸의 소리가 들릴 때 그는 깜짝 놀라 깨곤 한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 짓고 아니면 돌아눕는다 새벽 녘 내가 하늘을 거두어 올리면 그가 새가 되는 것이 눈에 들어와 하늘을 본다 하늘은 흐리고 새는 빛이 된다. 발 밑 냇물은 맑고 펜은 닳고 닳아 떠오른다 *옆집 개 이름 © 김정기 2019.02.27

흙 갈이 / 김정기

흙 갈이 김정기 꽃나무도 나이 들면서 헛소리를 한다. 십 수 년 묵은 집을 털고 새 흙에 심겨지니 이웃에 낯가림을 하면서 떠난 그늘을 벗어나지 못해 밤새도록 흩어진 친구를 부르다 끝내 실어증을 앓는다. 연한 뿌리들이 감추어둔 얼룩을 찾아 꿈틀대다 꺾이고 상하고 오래된 것들이 살갑지만 낯선 것은 서툴고 불편하다 그래도 새것은 눈부시다. 어두움에 길든 침묵은 햇볕에게 말을 건다. 질긴 끈으로 묶였던 시간들이 토막 나 뿔뿔이 달아나고 뒤섞여도 당신은 거기에 있었구나 창공에서 쏟아진 이름들이 숨긴 어제와 손잡아도 끌어안아도 흩어져버리는 이 땅 한 번쯤 뒤돌아본 당신의 흙 묻은 얼굴 그러나 계속 당신을 향해서만 고개 돌리는 타향 떠밀려온 흙은 그나마 화분에도 못 담기고 버려져 엉겅퀴를 키우지만. 장미꽃과 잡초가 ..

숲 / 김정기

숲 김정기 숲은 새벽의 기미로 달콤하다 술렁이며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어울려 여름을 만든다. 쓰르라미가 자지러지는 청춘의 손짓을 그때 그 순간을 잡지 못한 숲은 기우뚱거린다. 감춘 것 없이 다 들어낸 알몸으로 땡볕에 땀 흘리며 서있는 나무들에게서 만져지는 슬픔 절단해버린 발자국을 수 없이 되살리며 그들의 반짝임에 덩달아 뜨거움을 비벼 넣는다. 올해 팔월도 속절없이 심한 추위를 타는데 매일 시간은 새것 아닌가. 내 안에 충동은 오늘도 못 가본 곳을 살피지 않는가. 뒤 돌아보며 챙기지 못한 것 숨결 안에 가두고 오랜 비바람에 시달린 나무들의 얼굴은 상쾌하고 환하다 그들의 표정은 언제 보아도 편하다 더구나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웨스트체스터*의 여름 숲은. *뉴욕 북부 © 김정기 2010.08.08

|詩| 새벽 냄새

새벽에서 꽃 냄새가 난다 이상한 꽃 냄새 오후쯤에야 겨우 사라질까 말까 하는 뭇 별 냄새 내 쪽으로 오고 싶어 안달하는 은하수 냄새 얼추 회색인가 싶었는데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내 대뇌피질을 연신 건드리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산뜻한 빛의 율동 오래 전 음력설에 맡았던 영락없는 당신 색동저고리 냄새 © 서 량 2006.08.10 - 2021.08.16 (수정) 원본 - 세 번째 시집 (도서출판 황금알, 2007)에서

발표된 詩 2021.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