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8

넘어지다 / 김정기

넘어지다 김정기 쓰러지진 않았다 결코 잡을 수 없는 시간의 뒷덜미를 낚아채고 일어섰다 비 내리는 정원에서 어린 날 장터에서 70년대 청와대 앞에서 우리 집 거실에서 넘어지다. 그냥 쓰나미로 덮쳐오는 나이에 밀리지 않으려 삭아가지 않으려 해도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달빛은 숨을 죽인다 젖은 바람도 비켜간다 산이 허물어지고 강물이 멈춰도 힘센 손에 들려서 다시 일어섰다 넘어져도 보이는 햇살 만져지는 바람결 멀어져 간 내 몸에게 사과한다 © 김정기 2019.12.07

뉴욕의 물 / 김정기

뉴욕의 물 김정기 당신의 하늘에 남보라 잉크를 풀었다 허리춤이 살아나는 관능의 물이 호머*의 포도주가 되어 지중해를 채웠고 물가루가 그 멋에 분해되어 몸속으로 스며들 때 어려운 색깔이 숨죽이며 번져 당신은 한 방울, 유쾌한 뉴욕의 물. 몸속에 숨어있던 파인 구멍을 가볍게 덮어주는 달빛 온기를 잃지 말라고, 물의 씨를 말리지 말라고, 옥구슬이 되어 분만 되는 물방울은 여자에 엮이어 땅으로, 흙으로 스며든다. 스며든다. *19세기 미국화가 © 김정기 2011.04.17

가을도시 / 김정기

가을도시 김정기 새는 몸을 허물어 도시를 덮었다. 열린 창문마다 햇살을 불러들이고 물기 가시는 가로수엔 준비된 적요가 홀가분하다 그의 벤치에는 새들 앉았다가 날아간다. 유엔 빌딩 옆 이끼 낀 돌담에 담쟁이 넝쿨 까칠해진 살결에 박혀 조그맣게 흔들리는 손가락들. 음악을 하려다 시를 쓴 사람의 집 전화통속에 들리는 불자동차 소리 5th 애비뉴 성당에 파이프 올간과 자지러지는 풍금소리에 뮤지엄마다 반 고흐와 샤갈의 노랑과 남빛의 휘장을 조용조용히 열고 몰래 치룬 장례에 숨어서 우는 달빛 하나의 외로움으로 떠나고 있다. © 김정기 2010.09.24

숨은 새 / 김정기

숨은 새 김정기 창공이 무섭다. 썩은 어둠을 두르고 작아지는 날개를 움직인다. 발톱에 찍히는 바람의 무늬 오그라들어 점 하나로 남는 공간. 숨어서 껴안는 작은 그림자들이 빛나고 우리가 함께 버렸던 하늘이 흙이 되었던 비밀을 일러주는 색깔들. 뒤꼍에서 들리는 노래 소리에 다시 자라는 날개가 꿈틀거린다. 달빛의 힘줄을 딛고서. © 김정기 2010.06.08

|詩| 이거

포도를 먹고 있어 입에 침이 흥건하게 옛날을 씹듯 배경음악은 하하, 커다란 솜구름이 몸을 뒤척이며 코고는 소리 같기도 아니 이건 완전 업 비트 재즈 리듬이야 수영 선수가 휙휙 팔을 휘젓는 물 속에서 매번 푸푸, 고개를 쳐들 듯, 아니면 이 포도주잔 밑바닥에 달빛 출렁이는 밀물로 파고드는 비브라토가 심한 당신의 콧노래야 에코 흥건한 교회화음 물살이 내 이마를 가벼이 때리는 연신 따스한 소리, 이거 © 서 량 2012.12.19 – 2021.11.07

2021.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