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15

|담론| 나무와 성격에 대하여

“성격은 나무와 같고 평판은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는 우리들의 생각이지만, 나무는 현존하는 실체다. -- 아브라함 링컨 우리는 나무의 진정한 특성을 실제로 파악하지 못한다. 나무 그림자를 통해서만 나무를 인지할 뿐이다. 셰익스피어가 ‘맥베스’의 등장인물을 통하여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불쌍한 연극 놀이…"라고 이 생각을 넌지시 말했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사람의 성격을 햇빛이 있거나 조명의 각도에 따라 투사된 그림자를 통해서만 볼 수 있을 뿐.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듯이, 사람의 성격도 드러나지 않으면 알아내지 못한다. 나를 에워싼 빛이 빚어내는 다양한 형상의 내 그림자를 거듭해서 본다. ‘남들’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근본적인 빛의 원천이다. 그들이 나의 조명 환경이다. '인간 환경'! ..

나무를 베는 사람 / 김정기

나무를 베는 사람 김정기 날마다 나무가 쓸어진다 날카로운 전기톱에 소리도 못 지르고 쓸어진다 가끔 물위에 떠오르는 나무 가지를 건지며 그가 물 속에서도 톱질하고 있음을 알았다 오래도록 나무를 베면서 나무냄새 외에는 맡지 못해도 그는 언제나 고요하고 환하다 아주까리 꽃대궁이 솟아 오르던 날 저녁 나무들은 모조리 베어지고 톱밥이 온통 마을을 덮는데 그는 여전히 빛나는 톱을 들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나무를 벤 자리에 새 움이 돋고 숲을 이루어도 그 사람은 계속 나무를 벤다 멀리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푸르다 그는 나무다 가까이서 보는 그는 날선 톱이다 오늘도 바람으로 나르며 나무를 벤다 © 김정기 2010.05.17

빗소리를 듣는 나무 / 김정기

빗소리를 듣는 나무 김정기 이제 나무 잎 위를 구르는 빗소리 그 착한 언어의 굴절을 알아듣는다. 몸에 어리는 빗방울의 무늬를 그리며 한 옥타브 낮은 음정에 울음이 배어 수군거리는 천년의 고요 안에 당신의 대답이 울려온다. 밤새 내린 비에 몸 적시고 서서 잎새의 속삭임에 귀 기우려 휘청거리는 나무의 눈물을 당신은 모른다. 혼자만 갈 수 있는 길 위에 비가 내리고 비의 말을 헤아려 일기를 쓴다. 산이 깊을수록 빗소리는 커져서 한줄기 빛이 되는 비밀을 터득하니 먼 곳에서 들리는 몸 떠는 소리를 이제 알아듣는다. © 김정기 2012.08.17

벽돌 깨기 / 김정기

벽돌 깨기 김정기 벽돌에서 풋사과 냄새가 난다 컴퓨터 안에 열리는 벽돌은 못 말리는 식욕이다 창을 때리는 새벽 빗소리다 숨겨놓은 사랑이다 은빛 포장지다 눈 내리는 고향마을이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떨리는 詩다 사람보다는 나무가 꿰지 않은 구슬더미가 시인보다는 시가 좋아지는 겨울에 벽돌은 공을 맞고도 부서지지 않는다 안으로 안으로는 조여 안아 금강석이 된다 사각형 가슴에 묻어 놓은 벽돌에 빨려 들어간다 남은 시간이 아깝지 않다 © 김정기 2011.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