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8

밤기차를 타고 / 김정기

밤기차를 타고 김정기 바람에 덜미 잡혀 밤기차를 타고 떠나는 늦여름 저녁 아홉시 반 그대 머리칼에 나부끼는 진고동색 윤기가 챙 넓은 모자 속에서 숨죽이고 있네 개칠한 무늬 같은 죽은 깨 몇 알 콧날 위에서 흘러내려오고 가두었던 시간 어두움과 버무려 포로롱 풀려나는 멧새가 되네. 차창에 내린 커튼 젖히고 적막과 만나는 그대 아메리카의 땅 냄새를 싣고 가는 밤기차를 타고. 때로 뱃속에서 꿈틀대는 화냥끼를 명품가게에서 산 옷 한 벌을 우리 집 정원에서 자란 청청한 소나무를 그 삭을 줄 모르는 끈끈한 송진 냄새를 부윰하게 떠오르는 山麓을 향해 던지며 던지면서 내던지면서 오늘도 밤기차를 타고. © 김정기 2009.08.30

기차 객실 / 김종란

기차 객실 김종란 창 밖에 해 뉘엿뉘엿 지고 전등 빛 안 그림자 자란다 네가 읽는 책만 환하다 너의 턱 선과 손과 종아리만 환하다 잠시 기차 객실에서 네 마음 물방울 지며 빛난다 빛이 더 많이 떨어져 쌓이는 등받이 번잡함은 네 풍경에 들어가 스러진다 적요하다 기차는 노을을 품고 달린다 네가 책을 읽는 그림 기차 창 밖은 내가 사는 노을이다 너에게 편승한다 그림으로 남은 너에게 다가가 비춰 본다 뒤섞여 진 무리수와 유리수 기차를 그린 그는 넘치는 부분 치밀한 부분 담담하게 큰 붓으로 마무리 한다 © 김종란 2012.05.14

이 기차엔 비상약이 없다 / 김종란

이 기차엔 비상약이 없다 김종란 오후와 저녁 밤을 가로지르며 목쉰 소리를 내지르는 이 기차엔 승객이 없다 매캐한 연기 통로에 항상 낮게 머물러 메마른 눈 기차는 너무 빠르거나 느린지 아무도 볼 수 없다 어둠을 뚫고 가면서 형제를 만나는 생각을 했다 장방형 식탁에 팔꿈치 고이고 뜻 없는 이야기 주고 받는 겨울나무 밑 수북이 떨어진 마른 열매 하나 낙엽 기대어 뒹구는 시간을 이 기차는 형제를 만날 역전에 서지 않는다 너무 빠르거나 느려서 나는 그들을 볼 수도 없다 함께 자라난 초원 함께 손잡은 형상에 골몰하며 아주 오랜 시간 뒤 그 역을 다시 지나간다 낡고 다정한 역사(驛舍) 오후의 햇살을 받는 화단엔 그려 넣은 그들이 서있다 뒷모습 혹은 옆모습으로 자꾸 덧칠해서 알 수 없어진 감정의 선을 면도날로 긁어 내..

움직이는 역(station) / 김종란

움직이는 역(station) 김종란 살아 움직이는 말(언어) 눈 깜짝 할 사이 밤이 온 마음 울타리 넘는 은하수다 언어의 역전이 당당하게 불확실하게 서있다 눈빛 턱수염 역장의 미소가 신비롭다 *달리의 구부러진 시계, 확연하게 시간 너머에 서있는 언어의 역 당신의 지금을 지켜 보는 언어의 눈 시간과 공간에서 말의 속도에서 멀어지는 기차, 다시 몸을 숨기는 역 그 찰나 사람의 말은 태어난다 부러진 가지에 새 순, 소리 간직한 깊은 눈빛 하나 *Salvador Dali –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 김종란 2021.12.02

|詩| 옛날 기차가 서있는 풍경

기차가 달린다 턱시도 컬러 숯검정이 아닌 기차는 보라색, 플러스 나풀대는 해바라기 꽃잎 기차가 와장창 골을 때리네 기차는 알록달록하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부동으로 서있는 기차를 나는 사랑할 수 없어 제발 그러지 마 플리즈 기차가 서있는 풍경의 배경음악이 문제가 될수 있지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 멜로디는 따분해 저는 정말 그때만은 예외적으로 재즈 음률이 좋았습니다 무진장 기차가 시평(詩評) 받기를 거부한다 기차는 애오라지 기차일 뿐, 그런 기차가 기똥차게 달린다 격식이 없이, 격식이 없이 © 서 량 2011.03.02 - 2021.03.14

2021.03.14

|詩| 기차를 위한 감별진단

기차는 폐활량이 열라 크면서 여간 하지 않고서야 몸뚱어리가 뜨거워지는 법이 없대요 철로가 밑에서 받혀주는 균형감각도 대단하잖아 기차는 땡볕과 빗물에 시달리면서도 절대 넋두리를 하지 않는 독종이라지 기차의 특이체질은 유전에서 왔다 합니다 기차는 부끄러움도 없고 반성도 하지 않는대요 사태의 앞뒤를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 언성만 높여요 기차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세차게 달리는 기차를 밖에서 볼 때와 멋진 신사복 차림새로 기차 안에서 휙휙 지나치는 창밖을 내다볼 때를 잘 분별해서 묘사해야 된다는 말이겠지 당신과 함께 기차를 타고 어디론지 떠나고 싶어요 © 서 량 2012.05.31-- 월간시집 2012년 12월호에 게재

발표된 詩 2021.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