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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사소한 예감 2

사소한 예감 2 탐조등이 암흑을 절단한다 당신이 예각으로 쪼개지고 있어 눈에서 주홍색 전파를 지지직 내뿜는 도깨비를 보았지 도깨비를 방에서 쫓아내세요 흠씬 두들겨 팬 후에 속이 찔끔해지는 말을 해주시고요 부피감 없는 말을 부엌칼로 찔러봐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라는 귀띔이 있었다 당신의 예술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귀신으로 변한 거래 뜨거운 전류가 허파를 관통하네 갈라지는 내 가슴 詩作 노트: 예나 지금이나 내 몸 주변에 전류가 흐르고 있다 특히나 자고 있을 때 같은 때는 더 심하게 흐른다 © 서 량 2011.02.17 – 2024.01.30

2024.01.30

|詩| 겨울, 무대에 서다

겨울, 무대에 서다 세상과 대적하는 큰 역할이라네 새까만 물개 살갗 턱시도를 입고서 뺨 시린 복숭아색 욕망을 꽁꽁 감추는 완전 무대 체질이었어요 당신이 새빨간 커튼 앞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베이지색 북극 곰 걸음걸이 詩作 노트: 14년 전에 스무 줄이었던 구질구질한 詩를 여섯 줄로 확 줄였더니 속이 엄청 시원하다 © 서 량 2010.01.07 - 2024.01.28

2024.01.30

|詩| 내 겨울詩는 음산하다

사람 없는 뉴저지 북부 해변에 지금 당장이라도 가 보면 알 수 있다 무작정 비상하는 생명들이 남기는 흔적 그 빛들이 즉각즉각 화석으로 보존되는 당신 의식 속 가장 내밀한 공간에 가 보면 발바닥에 밟히는 뿌리 깊은 모래알이 깔깔해요 귀청 따가운 겨울 파도의 아우성이 당신 앞머리를 들뜨게 하는 뉴저지 북부 해변을 걸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리 해신(海神)의 숨소리가 귓불을 덥히는 동안 황금사과를 내가 매장시킨 가을이었더라도 노란 금가루를 떨치며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저히 잡지 못할 거예요 내 알뜰한 상상 밖으로 총알보다 빠르게 호랑나비 한 마리 날아간, 뉴저지 북부 가장 은밀한 해변에 오늘이라도 차 몰고 가 보면 대뜸 알 수 있다 © 서 량 2009.01.26 www.korea..

발표된 詩 2024.01.30

|詩| 편안한 겨울

내가 당신과 함께 먼 곳을 다녀 오고자 함은 당신과 가까워 지고 싶은 욕심에서다 겨울 숲 나무들이 손가락을 오그리고 서 있는 강변을 태양이 데운다 이글거리는 열기로 눈 부셔라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네 너무나 기분이 좋지만 얼굴을 찌푸리네 당신과 나 둘이서 머리를 합쳐 상상에 상상을 거듭해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그런 아득하게 먼 곳을 금방 다녀와서 쓸어질 듯 서로들 어깨를 비비는 나무들을 봐라 혼자서는 견디지 못하는 겨울 살결을 만져 봐라 맑은 새소리인 듯 나뭇가지 헛헛하게 흔들리는 모습인 듯 나는 당신의 말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겠다 재잘대는 당신 목소리는 내가 짐짓 좋아하는 겨울노래일 뿐 잘게 부수어진 태양 쪼가리 수 억만개가 널따란 강물 한군데에 몰려서 부글거린다 드디어 강물이 끓어 오른다..

발표된 詩 2024.01.30

|詩| 한글과 알파벳

한글과 알파벳 生時, 生時스러운 꿈, 미국여자가 말한다. 세종대왕이 쌍비읍과 쌍지읒의 합성어를 제작했다는 거. 요새 한국인들이 그 텍스트를 싹 무시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 창밖 주홍색 구름이 그거 매우매우 맞는 말이라 소리치네. 우렁차게. 젊으신 어머니, 좀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하시네. 내가 미국여자에게 말한다. “영어도 사라지고 있어. 알파벳이 뭉글뭉글 없어지고 있어.” 夢! 夢! 夢! 배경음악이 울린다. 혼성사중창.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뭉그러지네. 조용하게. 詩作 노트: 영어와 한국어를 되도록 섞어서 말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이중언어를 둘 다 잘 못한다. 영어가 더 편하다. 미안하다. © 서 량 2024.01.26

2024.01.28

|컬럼| 252. 눈 속의 무당벌레

2016년 1월 23일, 토요일, 뉴욕에 20인치가 넘게 폭설이 내렸다. 뉴욕 시장 빌 드블라지오는 아침 일찍 티브이에 나와 위태로운 도로사정을 예고하면서 절대 집밖에 나가지 말라며 "Stay home!" 하고 힘주어 말했다. 생체가 스트레스에 처했을 때 일으키는 원초적 반응을 생리학에서 "Fight or Flight"라 한다. 위기와 맞붙어 맹렬히 싸우거나, 힘이 딸려 여의치 못하는 경우에 오금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을 치는 원리다. 한 가지 방법이 더 있다. 그것은 즉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그 자리에 요지부동으로 있는 제3의 수법. 그날은 폭설과 싸울 수 없었고 열대의 섬으로 피신하고 싶어도 비행장으로 가는 도로가 완전 폐쇄된 날이었다. 미국인들이 개에게 "Stay!" 하고 소리치면 그것은 꼼..

|컬럼| 407. 정상, 비정상, Crazy?

엊그제 병동 환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미친(crazy) 생각을 할 수 있고, 미친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친 행동은 절대 안 된다. 우리 사회는 미친 ‘행동’을 용허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BC 322~384)가 주창한 웅변술의 3대 요소, Pathos(감성), Logos(논리), ‘Ethos(문화)를 생각한다. 감성은 원시적 본능, 논리는 일상적 자아, 문화는 사회적 윤리를 대변한다. 이 세 기둥이 튼튼하게 잘 어울리면 듣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단다. 정치가들의 발언에도 너끈히 적용되는 원칙이다. 허버트는 병동에서 화장실 변기에 비닐봉지, 우유통 쪼가리 따위를 집어 넣어서 변기를 막히게 하는 짓을 한다. 하나의 변기가 막히면 모든 환자들이 다른 병동 화장실을 이용해야 되는 불편..

|컬럼| 459. 심리치료

… 상징의 의미를 아무리 건드려 보아도/ 상징은 다시 살아나지 않음을/ 뒤늦게 전해드립니다/ 상징은 상징끼리만/ 오래 내통해 왔음을/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2001년 본인 詩, 「사고현장」 나는 약물치료에 치중하는 정신과의사를 ‘druggist, 약사’라 부른다. ‘druggist’라는 앵글로색슨어는 ‘pharmacist’라는 라틴어보다 소탈하게 들리지만, 길거리 마약도 ‘drug’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어감이 좋지 않다. 되도록이면 심리치료에 의존하는 정신과의사를 ‘psychotherapist’라 한다. 약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체인 반면, 심리는 추상적인 컨셉이다. 약을 신봉하는 의사를 ‘유물론자, materialist’, 심리치료를 추구하는 의사를 ‘유심론자, mentalist’라 부르면서 유사시..

|詩| 빛기둥

빛기둥 -- 마티스 그림 “분홍색 드레스의 소녀”에게 (1942) 빛 몇몇 빛 뭉치 초록 기둥에 대항하는 눈금 검정색 가느다란 눈금의 힘 눈 코 입이 없는 분홍색 여자의 힘 덜커덕 공중으로 뜨는 의자 육중한 안락의자의 힘 詩作 노트: 1942년 어느 날 눈 코 입이 없는 마티스의 여자가 안락의자 끄트머리에 앉아 손으로 의자를 짓눌렀다 © 서 량 2024.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