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52. 눈 속의 무당벌레

서 량 2024. 1. 27. 20:15

 

2016년 1월 23일, 토요일, 뉴욕에 20인치가 넘게 폭설이 내렸다. 뉴욕 시장 빌 드블라지오는 아침 일찍 티브이에 나와 위태로운 도로사정을 예고하면서 절대 집밖에 나가지 말라며 "Stay home!" 하고 힘주어 말했다.

 

생체가 스트레스에 처했을 때 일으키는 원초적 반응을 생리학에서 "Fight or Flight"라 한다. 위기와 맞붙어 맹렬히 싸우거나, 힘이 딸려 여의치 못하는 경우에 오금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을 치는 원리다.

 

한 가지 방법이 더 있다. 그것은 즉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그 자리에 요지부동으로 있는 제3의 수법. 그날은 폭설과 싸울 수 없었고 열대의 섬으로 피신하고 싶어도 비행장으로 가는 도로가 완전 폐쇄된 날이었다.

 

미국인들이 개에게 "Stay!" 하고 소리치면 그것은 꼼짝달싹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죽은 듯,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이다. 그렇게 뉴욕 시장은 시민들에게 "Stay!" 하고 명한 것이다.

 

'play opossum'이라는 관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캥거루처럼 배에 있는 주머니에 새끼를 넣고 다닌다 해서 우리말로 '주머니쥐'라 하는 'opossum'은 호주와 남미, 북미에 서식하는 들쥐로서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자리에 얼른 누워 죽은 시늉을 하는 동물이다. 그러는 동안 그들 몸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도 난단다. 이런 치사한 행동이 생식을 위주로 하는 동물에게 잡혀 먹는 위기를 벗어나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Stay!" 하는 명령어가 DNA 속에서 작동하는 주머니쥐!

 

'play opossum'을 영한사전은 '자는 척하다', 어떤 사실을 '모르는 척하다'라 풀이하지만 '죽은 척하며 가만있다'고 해도 좋을 터. 위계질서에 예민한 우리는 높은 사람에게 대드느니 죽은 듯 납작 엎드려야 안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한다'는 우리의 의식구조는 항상 유효하다. 미운 상대가 죽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당에서 'Fight or Flight' 원칙대로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않는 영특한 술책이다.

 

당신 눈에 익숙한 어릴 적 길섶 무당벌레도 죽은 시늉을 하는 데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들 또한 주머니쥐처럼 그 순간 몸으로 역겨운 냄새를 풍겨서 곤충식사를 즐기는 새들의 미각을 상하게 하는 방어본능을 과시한다.

 

15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stay'는 고대불어에서 '머물다'와 '서다(stand)'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어원학적 차원에서 보면 "Stay home!"은 폭설 때문에 당신이 소파에 옆으로 누워 죽은 척하라기보다 직립자세로 집안을 서성이며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운동도 하라는 메시지다. 이것이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 남녀가 딱 한 번 인연을 맺는 하룻밤 사랑을 'one night stay'라 하지 않고 'one night stand'라 하는 사연도 여기에 있다.   

 

'st'로 시작하는 말에는 강인한 이미지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차제에 또다시 밝혀야겠다. 'steel(강철)', 'stone(돌)', 'steady(안정된)' 같은 말들이 좋은 예. 'stay' 또한 튼실한 지구력을 암시하는 단어다. 어려운 상황이라 해서 경거망동하지 말고 진득하게 현실에 머물러 있으라는 충고다.

 

폭설이 내리던 그날 나는 중국 무술과 우리의 승무(僧舞)와 일본 검도에서 거론되는 성리학(性理學)의 '정중동 동중정(靜中動 動中靜)'을 생각했다.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다니!

 

그날은 죽은 척 디귿자로 누워있는 주머니쥐의 흉물스러운 몰골과 새빨간 반월형 등에 까만 점이 콕콕 박혀있는 무당벌레가 뇌리를 스치면서 하얀 눈이 산더미처럼 쌓이던 날이었다.

 

© 서 량 2016.01.25

-- 뉴욕중앙일보 2016년 1월 27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으로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16/01/26/society/opinion/3986557.html

 

[잠망경] 눈 속의 무당벌레

2016년 1월 23일 토요일 뉴욕에 20인치가 넘게 폭설이 내렸다. 뉴욕시장 빌 드블라지오는 아침 일찍 티브이에 나와 위태로운 도로 사정을 예고하면서 절대 집밖에 나가지 말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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