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詩| 색소폰 솔로

서 량 2021. 6. 20. 22:20

미리 준비한 것이 아무 쓸모 없어서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저 음부에서 눈을 감는 수법으로

한동안 멈추는 숨길

나와라 썩 나와라 발바닥부터 눈썹 위까지

하나뿐인 영혼을 뭉개버리는 뻔뻔함으로

땀방울도 질펀하게 울어라 얼마든지 울어라

녹아내리는 금덩어리 손가락의 흉계

찢어진 나뭇가지 가파른 낭떠러지 흙 꽃잎

소금 지렁이 샛노란 하늘 시커먼 돌멩이

씩씩한 군인이 구름 속에 넘어졌다가

한참 후에 툭툭 털고 일어난다

흐느끼는 것도 바람일 뿐이다

강물이 덩달아 울지 않는다

최고 음역에서 눈을 감는 수법으로

흙바람이 되돌아오는 기압골

소용돌이가 높은음자리표에 천천히 멎는다

무수한 소립자 십자 광선들이

금빛 색소폰 몸체 밖으로 이탈한다

 

시작 노트:
옛날에 쓴 시는 대개 몇 군데 고치고 싶기 마련인데. 25년 전에 쓴 이 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게 이상하다. 이 시를 쓸 때 말을 지지고 볶고 하지 않은 것 같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어떤 시는 평소에 몇 백 번 몇 천 번 느꼈던 감성과 감각이 저도 모르게 술술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온다는 것! 저도 모르게 말이지. - 2021.06.21

 

© 서 량 1996.10.08

--- 첫 번째 시집 <맨하탄 유랑극단>(2001, 문학사상)에서

'발표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詩| 뱀 무늬 수박  (0) 2021.08.29
|詩| 새벽 냄새  (0) 2021.08.16
|詩|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  (0) 2021.06.13
|詩| 왕만두와 한국 동창회 소식  (0) 2021.06.11
|詩| 여우비 내리는 날  (0) 2021.06.08